장률
대학교수·소설가 출신 재중동포
일상이 된 북이탈 담담히 그려내
“말할 권리 빼앗긴 이들에 관심
감정을 따라 찍으면 왜곡 덜해”
일상이 된 북이탈 담담히 그려내
“말할 권리 빼앗긴 이들에 관심
감정을 따라 찍으면 왜곡 덜해”
영화 ‘두만강’ 장률 감독
재중동포 장률(49·사진) 감독은 명확했다. 할 말은 다 풀어놓고, 못할 말은 딱 거절했다. 17일 개봉을 앞둔 그의 최신작 <두만강>의 화두 ‘탈북’이 워낙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탈북자들이 늘어나면서 두만강변 조선족 마을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을 따라가지만 궁극적으로는 남북한 문제, 인간의 본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중국 옌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이민 3세로, 옌볜대 중문학 교수 겸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바뀐 인생유전의 당사자이다. 그의 눈길이 두만강에 머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7일 종로구 통인동 영화사 인디스토리에서 만난 그는 몹시 스산한 현실을 설화처럼 풀어놓았다.
-<두만강>은 어떻게 찍게 됐나?
“내가 그쪽 출신이니 그런 게 보인다. 탈북은 남한에서 말하면 사건이고 이슈지만 그쪽에서는 생활이고 일상이다. 탈북은 내게도 초기에는 사건이었지만 일상화하면서 감정에 계속 남아 있게 됐다. 창작하는 이한테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차면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2003~4년 구상을 했는데 투자가 안 돼 늘어졌다. 그만둘 생각도 했지만 투자 문제 외 그만둬야 할 이유를 못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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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거쳤기 때문에 영화가 쉬웠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감정을 말할 줄 알고 감정흐름에 따를 수 있으면 작품을 내놓지 않아도 누구나 다 작가고 예술가다. 나는 공간에 민감하다. 어디 가나 공간에서 감정을 찾고 공간에 내 감정을 투사한다. 소리에도 민감하다. 어려서부터 소리의 순서에 따라 생각을 전개하는 데 익숙하다. 내가 산만하게 사니 그런가 보다. 하여튼 그것이 감정과 연계되어 있고 영화를 계기로 그런 게 묻어나오는 것 같다.” -공간과 소리에 대해 더 설명해 달라. “나는 세트를 만들지 않는다. 내 마음의 풍경과 비슷한 공간을 현실에서 찾는다. 내 영화를 보고 공간이 썰렁하다고 한다. 내 마음이 그렇기 때문이다. 한국에 와도 번화하고 휘황한 데 감정이 안 간다. 하지만 충무로 인쇄소 골목에 들면 나와 풍경이 맞다. 내가 외로우니 그런 공간에 끌리고 외로운 사람들한테 감정이 가는 거다. 보통은 몇 달씩 장소를 찾는데, 나는 가다가 맘에 드는 곳을 발견하면 더 찾지 않는다. 장소는 세련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음악을 쓰지 않는다. 소리로 내 감정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다른 영화에서 음악이 나오면 짜증 난다. 소리가 다 없어지고 억지로 감정을 쥐어짠다. 소리에 이례적으로 민감한 것은 어려서 말더듬이로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 탓이지 싶다. 놀림을 받아 사람 만나기도 싫었다. 말하면 다른 소리가 안 들리고 말을 않으면 별소리가 다 들리지 않는가.” -영화에서 대사가 적은 것도 그 탓인가?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면 그곳은 언어 없이도 소통하는 곳이다. 말 많은 걸 싫어한다. 내가 관심 있는 소외된 사람들 역시 말이 적은 이들이다. 그들은 말할 기회도 없고 말할 권리도 빼앗긴 상태다. 궁극적으로 영화는 대사 없이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내가 말이 많아졌다. 하하.” -제1 언어가 중국어여서 중국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는데…. “언어보다 더 깊게 감정과 관련된 게 음식이다. 사상도 무리하면 다 바꿀 수 있는데 입맛은 못 바꾼다. 어디 가나 된장찌개·김치를 찾게 된다. 작년에 영화제 참석차 러시아에 갔는데 고려 사람 집에 초대를 받았다. 처음에는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우리음식을 같이 맛보며 30분 정도 지나니 얘기의 80%는 알아듣겠더라. 출신은 감출 수 없다.” -배우들 연기도 절제돼 있더라. “배우의 연기를 보면 못 견디는 스타일이다. 연기는 본질적으로 가짜다. 아무리 절제해도 연기는 연기다. 직업배우들하고 작업하는 게 가장 힘들다. <두만강>에는 직업배우가 없다. 모두 그 마을 사람들이고 아이들도 그 지역 학교에서 선발했다. 이야기를 많이 하고 어른들은 같이 술을 마시는 게 최고다. 하루 정도 지나면 금세 가까워지고 찍는 데 지장이 없다.” -빨리 찍기로 유명한데 계획을 잘 세워서인가? “생각 않고 찍기 때문이다. 찍은 다음 반드시 후회한다. 이렇게 하다가 망하지, 다음에는 계획을 꼭 세워야지, 마음먹는다. 나는 현장에서의 감정을 따르는 게 덜 왜곡된다고 본다. 10년 전 첫 단편을 찍을 때 그런 버릇이 생겼다. 그때 완벽하게 시나리오를 준비했었다. 현장에 가서 막상 공간을 보니 어떻게 할 줄 모르겠더라. 오전 내내 하나도 못 찍었다. 그때 시나리오를 찢어버렸다. 감정을 따라 찍으니 왜곡이 덜 되더라. 시나리오는 감정의 대본일 뿐이다. 나쁜 버릇을 합리화하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6편이 운 좋게도 잘됐다. 다음번에는 망할지 모르겠다.” -등장인물 중 여성은 착하고 남성은 악하다. 왜 그런가? “현대사회 권력구조가 그렇다. 남성이 권력을 잡아 부드러움이 다 제거되고 힘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여성들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여성성을 잊지 말고, 못 본 체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성의 본성으로 권력구조가 만들어지면 적어도 지금 이 모양은 아닐 거다. 치매노파가 두만강 다리를 건너는 마지막 장면은 그런 희망사항이다.” -영화 시작이 남달랐다는데? “2000년쯤 감독을 지망하는 친구가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했다. 내가 말하는 방식이 영화화면처럼 느껴진다고 하더라. 10년 백수생활을 하는 터에 쓸모 있다니 써주었다. 당국 검열에서 떨어졌다. 수정해 달라기에 내가 좋아하는 장면과 대사를 빼고 이틀 만에 고쳐주었다. 친구가 이것은 검열용이고 통과되면 원래대로 찍겠다고 했다. 통과돼 그 친구가 준비를 하는데 수정대본을 들고 다니더라. 원래대로 한다더니 왜 그러냐고 따졌더니 ‘네가 영화판을 몰라서 그렇다’고 했다. 화가 나서 영화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내가 너보다 먼저 할 거라고 큰소리쳤다. 이튿날 술을 깨고 나니 내가 한 말이 기억이 났다. 나는 말을 그냥 못 넘어가는 스타일이다. 그게 시작이다. -재생산 구조는 되나? “하루하루 견디며 산다. 그게 삶이다. 큰 희망이 없으면 갈 때까지 갈 수 있다. 어차피 돈 벌자고 하는 게 아니다. 예술영화라고 자꾸 벽을 높여가는데, 나처럼 콕콕 벽을 부수는 사람도 있어야 재밌지 않은가.” 정리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감정을 말할 줄 알고 감정흐름에 따를 수 있으면 작품을 내놓지 않아도 누구나 다 작가고 예술가다. 나는 공간에 민감하다. 어디 가나 공간에서 감정을 찾고 공간에 내 감정을 투사한다. 소리에도 민감하다. 어려서부터 소리의 순서에 따라 생각을 전개하는 데 익숙하다. 내가 산만하게 사니 그런가 보다. 하여튼 그것이 감정과 연계되어 있고 영화를 계기로 그런 게 묻어나오는 것 같다.” -공간과 소리에 대해 더 설명해 달라. “나는 세트를 만들지 않는다. 내 마음의 풍경과 비슷한 공간을 현실에서 찾는다. 내 영화를 보고 공간이 썰렁하다고 한다. 내 마음이 그렇기 때문이다. 한국에 와도 번화하고 휘황한 데 감정이 안 간다. 하지만 충무로 인쇄소 골목에 들면 나와 풍경이 맞다. 내가 외로우니 그런 공간에 끌리고 외로운 사람들한테 감정이 가는 거다. 보통은 몇 달씩 장소를 찾는데, 나는 가다가 맘에 드는 곳을 발견하면 더 찾지 않는다. 장소는 세련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음악을 쓰지 않는다. 소리로 내 감정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다른 영화에서 음악이 나오면 짜증 난다. 소리가 다 없어지고 억지로 감정을 쥐어짠다. 소리에 이례적으로 민감한 것은 어려서 말더듬이로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 탓이지 싶다. 놀림을 받아 사람 만나기도 싫었다. 말하면 다른 소리가 안 들리고 말을 않으면 별소리가 다 들리지 않는가.” -영화에서 대사가 적은 것도 그 탓인가?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면 그곳은 언어 없이도 소통하는 곳이다. 말 많은 걸 싫어한다. 내가 관심 있는 소외된 사람들 역시 말이 적은 이들이다. 그들은 말할 기회도 없고 말할 권리도 빼앗긴 상태다. 궁극적으로 영화는 대사 없이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내가 말이 많아졌다. 하하.” -제1 언어가 중국어여서 중국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는데…. “언어보다 더 깊게 감정과 관련된 게 음식이다. 사상도 무리하면 다 바꿀 수 있는데 입맛은 못 바꾼다. 어디 가나 된장찌개·김치를 찾게 된다. 작년에 영화제 참석차 러시아에 갔는데 고려 사람 집에 초대를 받았다. 처음에는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우리음식을 같이 맛보며 30분 정도 지나니 얘기의 80%는 알아듣겠더라. 출신은 감출 수 없다.” -배우들 연기도 절제돼 있더라. “배우의 연기를 보면 못 견디는 스타일이다. 연기는 본질적으로 가짜다. 아무리 절제해도 연기는 연기다. 직업배우들하고 작업하는 게 가장 힘들다. <두만강>에는 직업배우가 없다. 모두 그 마을 사람들이고 아이들도 그 지역 학교에서 선발했다. 이야기를 많이 하고 어른들은 같이 술을 마시는 게 최고다. 하루 정도 지나면 금세 가까워지고 찍는 데 지장이 없다.” -빨리 찍기로 유명한데 계획을 잘 세워서인가? “생각 않고 찍기 때문이다. 찍은 다음 반드시 후회한다. 이렇게 하다가 망하지, 다음에는 계획을 꼭 세워야지, 마음먹는다. 나는 현장에서의 감정을 따르는 게 덜 왜곡된다고 본다. 10년 전 첫 단편을 찍을 때 그런 버릇이 생겼다. 그때 완벽하게 시나리오를 준비했었다. 현장에 가서 막상 공간을 보니 어떻게 할 줄 모르겠더라. 오전 내내 하나도 못 찍었다. 그때 시나리오를 찢어버렸다. 감정을 따라 찍으니 왜곡이 덜 되더라. 시나리오는 감정의 대본일 뿐이다. 나쁜 버릇을 합리화하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6편이 운 좋게도 잘됐다. 다음번에는 망할지 모르겠다.” -등장인물 중 여성은 착하고 남성은 악하다. 왜 그런가? “현대사회 권력구조가 그렇다. 남성이 권력을 잡아 부드러움이 다 제거되고 힘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여성들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여성성을 잊지 말고, 못 본 체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성의 본성으로 권력구조가 만들어지면 적어도 지금 이 모양은 아닐 거다. 치매노파가 두만강 다리를 건너는 마지막 장면은 그런 희망사항이다.” -영화 시작이 남달랐다는데? “2000년쯤 감독을 지망하는 친구가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했다. 내가 말하는 방식이 영화화면처럼 느껴진다고 하더라. 10년 백수생활을 하는 터에 쓸모 있다니 써주었다. 당국 검열에서 떨어졌다. 수정해 달라기에 내가 좋아하는 장면과 대사를 빼고 이틀 만에 고쳐주었다. 친구가 이것은 검열용이고 통과되면 원래대로 찍겠다고 했다. 통과돼 그 친구가 준비를 하는데 수정대본을 들고 다니더라. 원래대로 한다더니 왜 그러냐고 따졌더니 ‘네가 영화판을 몰라서 그렇다’고 했다. 화가 나서 영화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내가 너보다 먼저 할 거라고 큰소리쳤다. 이튿날 술을 깨고 나니 내가 한 말이 기억이 났다. 나는 말을 그냥 못 넘어가는 스타일이다. 그게 시작이다. -재생산 구조는 되나? “하루하루 견디며 산다. 그게 삶이다. 큰 희망이 없으면 갈 때까지 갈 수 있다. 어차피 돈 벌자고 하는 게 아니다. 예술영화라고 자꾸 벽을 높여가는데, 나처럼 콕콕 벽을 부수는 사람도 있어야 재밌지 않은가.” 정리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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