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다크나이트 라이즈>
[2012 문화현장] 영화
한 대기업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다가 ‘밋밋한 첫사랑 얘기’라며 투자를 포기했던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고 한다. 극중 스무살 ‘서연’(수지)이 ‘승민’(이제훈)의 귀에 꽂아준 이어폰에서 1990년대 인기곡 ‘기억의 습작’이 흘러나온 순간, 첫사랑의 설렘과 뜨거웠던 청춘에 대한 그리움이 뒤섞여 밀려들었다는 것이다. <건축학개론> 상영 당시 온라인엔 한 극장의 ‘낮 시간대 좌석 예매현황판’이란 흥미로운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지나간 첫사랑을 떠올리며 혼자 보려는 이들이 많아 관객 2~3명씩 붙어 앉은 좌석이 거의 없는 풍경이 담긴 사진이었다.
영화 홍보사 직원 49명 설문서
류승룡은 ‘인상적 배우’ 최고점
‘알투비’는 가장 혹평받은 영화
‘민망한 배우’엔 박진영·고현정 연인·부부들이 손잡고 극장에 들어갔다가 각자 추억에 잠겨 잡은 손을 풀고 나오기도 했다는 영화 <건축학개론>이 <한겨레> 설문조사에서 ‘다시 보고 싶은 올해의 영화’ 1위(12표)로 꼽혔다. <한겨레>는 국내 17개 영화홍보사(영화수입·독립영화 배급사 포함) 직원 49명을 상대로 올해 영화계를 돌아보는 설문조사를 했다. 이들은 국내외 개봉작을 홍보하고, 배우들의 언론 인터뷰를 진행하며 영화계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영화인들이다. 응답자들은 “건축과 첫사랑을 결합한 소재의 독특함”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상처를 위로해준 웰메이드 멜로영화” “9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감성과 음악이 어우러져 여운이 길게 남은 작품”이라며 <건축학개론>을 가장 인상적인 영화로 뽑았다. 1990년대 대학 시절과 당시 가요를 ‘향수의 코드’로 다룬 이 영화는 문화 주소비층으로 떠오른 30~40대의 추억을 자극하는 가요와 드라마가 문화상품으로 나오는 데 영향을 줬다. <건축학개론>(410만명)은 올해 9편이나 나온 ‘400만 흥행영화 대열’에 합류해, ‘한국 영화 연간 1억 관객 시대’를 여는 데 탄탄한 허리 구실을 했다. ‘배트맨 시리즈’의 마지막 완결편인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다크나이트 라이즈>(9표)에 대해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묵직한 철학적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영화”라는 평들이 나왔다. “시공간을 초월한 환상적인 낭만여행”을 보여준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 “배우들의 호연과 탄탄한 스토리로 인물과 영화 속 시대가 생생히 살아 있던 작품”이었다는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 <내 아내의 모든 것>(“기존 이미지를 깬 임수정의 도발적 매력”)이 5위 안에 들었다. 영화가 담으려는 감성과 이야기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캐릭터가 생동감있게 살아 있을 때 요즘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추세를 반영한 결과다.
‘여성을 유혹하는 카사노바’(<내 아내의 모든 것>)와 ‘왕을 돕는 도승지 허균’(<광해>)이란 이질적인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표현한 류승룡(11표)이 올해 가장 인상적인 배우 1위에 올랐다. “미남이 아닌데도 미남으로 보이게까지 하는 연기의 매력” “대종상·청룡영화제 조연상을 받았지만, 스크린 장악력은 주연급”이라는 지지가 잇따랐다. 올해 2편에 출연해 1700만명을 모은 류승룡은 내년 1월 개봉할 <7번방의 선물>에선 지능이 낮은 아빠 역을 맡아 주연배우로서 흥행력에 도전한다.
조정석(9표)에겐 “캐릭터에 완전히 녹아든 연기” “‘납뜩이’(영화 배역 이름) 없는 <건축학개론> 흥행은 상상할 수도 없다” “올해 영화계가 건진 수확”이란 평들이 이어졌다. “어떡하지 너?” “그럼 뭐 아구창 날릴까?” 같은 그의 영화 코믹대사들이 인터넷에 어록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남자배우들에 비해 20~30대 여배우의 활동공간이 좁은 영화계에서, 올해 주목할 성과를 낸 <화차>의 김민희(“여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새롭게 증명해 보였다”), <은교>의 신인 김고은(“관능과 순수함을 가진 신선한 얼굴. 개성있는 배우로 성장했으면 좋겠다”)에 대한 응원도 많았다.
제작비 규모와 스타 캐스팅에 비하면 완성도와 흥행성적에서 실망을 안긴 ‘빛 좋은 개살구 영화’엔 100억여원의 제작비를 쏟고도 관객 120만명에 그친 <알투비: 리턴투베이스>가 최다표(20표)를 얻었다. 전투기의 비행장면은 역동적으로 구현했으나, 인물의 감정흐름과 이야기 전개가 급작스러웠다는 지적이었다. “내용 없는 블록버스터 계보를 이어간 영화” “비싼 돈(제작비) 들여 스토리의 중요성을 다시 학습한 작품”이라고 꼬집었다. 씨제이는 자신들이 투자·배급한 대작 <마이웨이> <7광구> <리턴투베이스>가 줄줄이 흥행에서 저조한 탓에, 25일 개봉하는 재난 블록버스터 <타워>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제작 도중 감독이 교체되는 곡절을 겪었던 고현정·유해진·박신양 주연의 <미쓰고>(7표·“출연배우들이 아까울 정도로, 이들을 살리지 못한 캐릭터 설정과 스토리”),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돈의 맛>(5표·“돈의 맛을 날카롭게 들여다보지 못했다”)도 따가운 비판을 비켜가지 못했다. 1300만명을 모은 <도둑들>은 “엔터테인먼트 영화로서 가장 충실했던 작품”이었지만, “캐스팅만 화려했다”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가요계 실력자에서 신인 영화배우로 변신한 박진영은 “도전정신은 좋으나, 연기는 보기 힘든 수준”이란 지적과 함께, ‘올해 가장 민망한 배우’(8표)에 올라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그의 주연작 <500만불의 사나이>의 관객은 20만명에 그쳤다.
그간 연기 내공을 갖춘 배우들로 평가받던 고현정(7표·“과거 티브이(TV)에서 보여준 연기의 파급력이 스크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올해 <페이스메이커> <연가시> <간첩>에 출연한 김명민(6표·“지나치게 열심히 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운 연기”)이 자신들의 연기 역량을 제대로 발현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을 만나기를 바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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