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숲 속의 전설>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목련이 필 때마다 난 다시 열아홉살이 된다. 매주 티브이 앞에 앉아 <안데르센 동화나라>를 보던 꼬마가 된다. 그중 엄지공주를 특히 사모하던 소년이었다. 내 기억 속 그녀는 꼭 목련 꽃잎 하나를 이불 삼아 덮고 잤다. 다른 장면은 다 잊혔는데 이상하게 그 장면만 또렷하다. 집 앞마당에 떨어진 목련 꽃잎을 주워와 기껏 점보 지우개나 덮어주며 아쉬워하던 기억까지도 생생하다. 올봄에도 목련은 피었고 올봄에도 잠시 난 소년이 되었지만 역시 올봄에도 엄지공주는 만나지 못했다.
<에픽: 숲 속의 전설>을 보는 100분이 특히 흐뭇했던 까닭은, 목련 꽃이 진작 다 떨어지고 없는 여름에 또 한번 소년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엄지손가락만한 미지의 생명체를 만나고 싶어하는 괴짜 과학자 봄바는 어릴 적 내 모습을 닮았다. 나는 일찌감치 공상을 접고 평범한 어른이 되었지만 그는 평생을 바쳐 과학으로 자신의 상상을 입증하려 애쓰고 있다. 그런 아빠 때문에 한숨만 쉬던 딸이 우연히 마법에 걸려 ‘그들’처럼, ‘그들’만큼, 아주 작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달팽이 친구들과 함께 작은 새의 등에 매달려 신나게 하늘을 날아다닌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딸에게 봄바가 해주던 이 말을 더 많은 어른들이 더 많은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좋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할 것만 같은 어떤 것을 끊임없이 상상하는 사람은 생각의 크기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일찌감치 공상을 접고 평범한 어른이 되고 말았지만, 평생을 바쳐 과학으로, 문학으로, 미학으로, 혹은 다른 그 무엇으로 자신만의 상상을 열심히 입증하려 애써 온 괴짜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훨씬 더 재미난 세상을 살게 된 거라고 믿는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초대 소장 플렉스너가 1939년 ‘쓸모없는 지식의 효용’이란 글에서 “돈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무해한 괴짜들을 약간은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아마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김우재, <한겨레> 2013년 4월9일치 ‘암실의 초파리’)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상상하려는 아이들에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도 품고 있을 것만 같은 어떤 공간이 꼭 필요하다. 틈이 많고 빛이 적은 공간. 흙, 숲, 늪, 굴, 그리고 어떤 곳의 밑과 같은. 그래서 플렉스너 할아버지를 흉내내어 ‘쓸모없는 장소의 효용’이란 글이라도 쓰게 된다면, “공간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무해한 자투리땅들을 약간은 남겨두어야 한다”고 쓰고 싶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마루 밑 아리에티>(2010)는 일본 교외 오래된 주택의 마루 밑 아주 작은 사람들 이야기다. 인간의 잡동사니를 요긴한 세간살이로 바꾸어 쓰는 가족. 야무지게 묶은 포니테일 찰랑이며 아빠와 함께 인간들의 주방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10㎝ 소녀. 천신만고 끝에 각설탕 하나 훔쳐내서 기쁘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아리에티. 그 쓸모없는 공간에서 나름의 쓸모를 궁리하며 사는 상상의 존재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 건 내가 어릴 적, 자주 들여다볼 마루 밑이 있는 단층집에 살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집 가까이 키 큰 잡목이 우거진 숲이 있는 아이라면, 달팽이와 개구리를 볼 수 있는 작은 습지나 공터 가까이에라도 사는 아이라면, <에픽: 숲 속의 전설>을 보고 난 뒤 훨씬 많은 것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어른이 된 뒤에도 잠시 소년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좀더 자주 찾아오게 될 것이다. 쓸모없는 장소, 쓸모없는 상상, 쓸모없는 지식들의 사실은 아주 소중한 쓸모에 대해, 두고두고 신이 나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도시의 아파트에서도 우리 몰래 살아가는 아주 작은 존재를 상상했던 영화를 알고 있다. <조의 아파트>(1996). 툇마루 밑 쓸모없는 공간 따위 남겨두지 않은 가장 합리적인 도심 주거 공간에서 ‘그들’이 숨을 곳은 하수구뿐이었다. 물론 ‘그들’ 역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꼭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 조의 아파트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바퀴벌레가 생각보다 참 많았던 것이다.
우리 아파트 정기 소독일이 다가온다. 부디 엄지공주만한 바퀴벌레는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한다.
김세윤 방송작가
<한겨레 인기기사>
■ [단독] “웃는 사람 보면 죽이고 싶었다” 엽기적 ‘차량 돌진 살인’
■ 장외투쟁 나선 민주당, “원판김세” “남해박사” 외쳐
■ 30명 성폭행·살해 ‘공포의 살인마’…알고보니 ‘과대망상증 환자’
■ [화보]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해수욕장 풍경 변천사
■ [화보] 한집 같은 두집, 따로 또 같이 산다
김세윤 방송작가
■ [단독] “웃는 사람 보면 죽이고 싶었다” 엽기적 ‘차량 돌진 살인’
■ 장외투쟁 나선 민주당, “원판김세” “남해박사” 외쳐
■ 30명 성폭행·살해 ‘공포의 살인마’…알고보니 ‘과대망상증 환자’
■ [화보]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해수욕장 풍경 변천사
■ [화보] 한집 같은 두집, 따로 또 같이 산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