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크>(2008)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김조광수 감독님께.
‘당연한 결혼식’을 앞둔 감독님께 아주 당연한 덕담을 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시사회장에서 몇 번, ‘영화 만든 사람’과 ‘영화 보는 사람’ 사이에 오갈 수 있는 가장 무난하고 의례적인 대화만 주고받은 게 전부이면서 괜히 친한 척하는 게 퍽 쑥스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꼭 쓰고 싶은 편지입니다.
방금 감독님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누군가 먼저 걷지 않으면 새로운 길은 열리지 않는다” “그 길이 성적 소수자들이 엄연한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는,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마 오랜 싸움이 될 것이다”. ‘당연한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다져야만 하는 신랑(이면서 신부)을 응원하고 싶어집니다. 분명 감독님도 보셨을 영화 <밀크>(2008·사진)의 주인공 하비 밀크(숀 펜)에게 도움을 청해봅니다.
감독님처럼 하비도 마흔살에 연하의 게이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맞이한 1970년대를 게이 인권운동가로 살았고, ‘커밍아웃한 게이로는 처음 미국의 선출직 공무원이 된 정치인’으로 역사에 기록된 하비 밀크. 영화에는 그가 선거에 출마한 뒤 협박 편지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무시무시한 편지를 버리는 대신 잘 보이는 냉장고 문에 붙여 두면서 이렇게 말해요. “이걸 안 보이게 숨기면 점점 무서워지지만 매일 이렇게 보면 아무렇지 않아.”
하비는 동성애자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존재로 만들고 싶었을 겁니다. 안 보이게 숨지 말고 냉장고 문에 붙여둔 편지처럼 남들 앞에 매일 꿋꿋하게 나선다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게이를 만나도 정말 ‘아무렇지 않은’ 날이 오리라 믿었을 겁니다. 하지만 세상의 공격은 집요했죠. 특히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공화당 정치인 애니타 브라이언트가 내뱉은 이 말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만일 동성애자에게 시민의 권리를 허락한다면 매춘부와 도둑에게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이 지독한 편견에 동조하는 정치인들이 동성애자 교사를 퇴출시키는 법안을 추진할 때, 동성애자 교사들 때문에 자기 아이들도 동성애자가 될 거라며 호들갑을 떨 때, 토론회에 참석한 하비 밀크의 멋진 반격을 감독님도 기억하실 겁니다. “아니, 동성애를 어떻게 가르칩니까? 그게 프랑스어 같은 건가요? 저는 이성애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성애자 선생님에게 배웠고, 완전한 이성애자 사회에서 자랐어요. 그럼 왜 저는 동성애자가 된 것일까요?”
2009년, 감독님이 연출한 영화 <친구사이>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죠. 감독님은 ‘등급 분류 결정 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냈고 결국 승소했습니다. 당시 변호사가 변론문에서 이 영화 <밀크>를 언급하며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논리를 반박했다죠? 아마 조금 전 제가 언급한 바로 그 대사를 인용한 게 아니었을까, 혼자 추측해봅니다.
“미성숙한 청소년이 일반적 지식으로 동성애를 이해하기 힘들고 모방의 위험성”이 있으며,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는 청소년이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을 저해한다”는 게 당시 영등위의 주장이었다는데…. 글쎄요,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어른들이야말로 청소년이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을 저해하는 진짜 주범이 아닌가요?
<밀크>의 촬영 첫날.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카메라가 돌기 2분 전, 거짓말처럼 구름이 사라지고 촬영장 위로 거대한 무지개가 걸렸습니다. 그 무지개를 보면서 자신 역시 성적 소수자였던 시나리오 작가도, 하비 밀크의 옛 친구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하죠. 아시다시피 무지개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상징. 어쩌면 하늘나라의 하비 밀크가 나름의 방식으로 이 영화를 응원한 건 아니었을지.
저는 감독님의 ‘당연한 결혼식’이 열리는 9월7일에도 비가 오면 좋겠습니다. 저녁 6시 직전, 거짓말처럼 구름이 사라지고 청계천 광통교 위로 무지개가 내걸리는 광경을 상상해 봅니다. 생각만 해도 참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더구나 결혼식날 비가 오면 잘 산다면서요?
끝으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인 가족의 결혼식에 보낸, 매우 짧지만 아주 근사한 축사로 제 마음을 전합니다. 냉장고에 잘 보이게 붙여 두어도 좋을 겁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나도 한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별로 좋지 않을 때는 나는 늘 뭔가 딴생각을 떠올리려 합니다. 그렇지만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좋을 때가 많기를 기원합니다. 행복하세요.”(<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중 ‘좋을 때는 아주 좋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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