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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누가 진짜 ‘조국의 적’인가

등록 2013-10-04 19:49수정 2013-10-04 22:20

영화 <굿 셰퍼드>(2006)
영화 <굿 셰퍼드>(2006)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영화 <굿 셰퍼드>(2006)에서 맷 데이먼이 연기한 주인공 에드워드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이다. 조국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Good Shepherd)로 살고 싶어 선택한 일이다. 하지만 온갖 첩보 업무에 청춘을 바치고 이제 와서 돌아보니 선한 목자 드립은 ‘니미뽕’. 정보기관이 가야 할 바른 길이란 게 뭔지 헷갈리고, 자신이 진짜 사랑하는 게 ‘조국’인지 ‘조직’인지 알 수 없게 된 탓이다. 그리하여 한때 애국심으로 무장했던 ‘요원’이 한낱 애사심을 강요받는 ‘직원’으로 천천히 쪼그라드는 삶이란, 그저 애처롭고 애틋하기만 하다.

시아이에이의 은밀한 흑역사를 인사이더의 시선으로 회고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장면은 마지막에 준비되어 있다. 에드워드가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친 직속 상사와 몇마디 말을 섞는다. 그런데 짧은 대화 끝에 툭, 상사가 동전처럼 흘리고 떠난 한마디. 그게 오래도록 우리의 머릿속을 굴러다니는 것이다. “전에 어느 의원이 묻더군. 왜 시아이에이를 부를 때 정관사(The)를 안 붙이냐고. 내가 되물었지. 신(God)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를 붙이냐고.”

감히 신과 겸상하고 조물주와 야자를 트겠다는 정보기관의 야심.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1998)도 염려한다. 첩보 위성의 힘을 빌려 정말 신처럼 하늘에서 굽어살피시며 전 국민을 깨알같이 감시해온 미국 국가안보국(NSA). 주인공 로버트(윌 스미스)가 날린 카운터펀치를 얻어맞고 잠시 휘청거린 엔에스에이가 얼른 셀프 개혁안을 내놓는다. 불법 도청과 감청을 더이상 하지 않겠다는 발표(오잉?). 대신 앞으로는 ‘합법적으로’ 도청하고 감청하겠다는 선언(뭬야?). 이참에 엔에스에이의 권한을 대폭 확대해 모든 개인정보를 마음껏 수집하고 활용해도 전혀 문제 되지 않도록 법을 고치겠다는 국회의원이 티브이에 나와서 떠드는 얘기도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우리는 우리의 적을 감시해야 합니다. 물론 적을 감시하는 그 사람들을 엄격하게 감시하는 것 역시 필요하겠죠.” 말장난 같은 해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주인공의 아내가 핵심을 찌른다. “그러면, 감시하는 사람을 감시하는 그 사람은 대체 누가 감시하는데?”

학자들은 지난 역사에서 큰 비극을 초래한 사람들의 심리, 흔히 ‘광기’라고 부르는 걸 이렇게 정의한다. “‘어떻게’라는 도구적 사고가 ‘왜’라는 정당성을 압도하는 정신 상태.” 다시 말해서 목적 달성을 위한 최선의 수단은 생각해내면서 그 목적 자체의 옳고 그름, 정당성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가 말하는 국가(state)의 진짜 적(enemy)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영화 <굿 셰퍼드>에서 ‘선한 목자’ 코스프레로 감히 신의 자리를 넘보며 전지전능의 조직을 꿈꾸던 바로 그 사람들 말이다.

“여기, 공산당원 205명의 명단이 있습니다. 이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국무성에 숨어 미국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역시 ‘광기’에 사로잡힌 매카시 상원의원의 개떡 같은 소리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미국 정보기관이 바쁘게 움직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주장을 확인도 하지 않고 연일 대서특필한 언론 덕분에, 매카시를 비판하면 공산주의자로 몰릴까봐 침묵한 언론 덕분에, 그의 무책임한 폭로가 4년 동안 미국을 쥐고 흔들었다. 미국 언론사의 가장 부끄러운 한 페이지로 기록된 시절, 카메라 앞에서 용기있게 진실을 전한 한 사람. <시비에스>(CBS)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에드워드 머로는 영화 <굿나잇 앤 굿럭>(2005)에서 잊지 못할 장면을 연출해낸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매카시즘에 맞서 프로그램을 만들기 전, 혹시라도 정부에 꼬투리 잡힐 만한 전력이 있는 사람은 미리 얘기하라고 한다. 한 직원이 자신의 아내, 그것도 이미 이혼한 전처가 과거 진보적인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면서 미안한 표정으로 팀에서 빠지겠다고 말한다. 그때 머로가 한 말이 참 근사하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위험한’ 책 한번 읽지 않고, 좀 ‘다른’ 친구 한번 사귀어보지 않고, ‘변화’를 부르짖는 단체에 한번 기웃거려본 적 없다면, 우리 모두 기껏 매카시 같은 인간이 되어 있겠지.”

머로는 생전에 이런 말도 남겼다. “‘이견’을 ‘이적’과 혼동해선 안 된다.” 그런데 아직도 ‘이견’을 말하면 ‘이적’으로 몰아세우는 자들, 그러니까 ‘기껏 매카시 같은 인간’들이 세상엔 적지 않은 모양이다. 매미가 울음을 그쳤는데도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운 걸 보면. ‘어떻게’라는 도구적 사고가 ‘왜’라는 정당성을 압도했던 조직이 댓글로 남긴 흔적이 이리도 많고 넓은 걸 보면.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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