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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사회적 약자들에게 온기와 용기를…

등록 2013-11-01 19:30수정 2013-11-15 16:04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2007)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2007)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가슴 아픈 청춘영화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2007)의 주인공 제휘(임지규)는 학창 시절 ‘치타’로 통했다. 타잔을 잘 따르는 침팬지 ‘치타’처럼 자신을 잘 따르고 복종하라며 동급생 표(표상우)가 붙여준 별명이다. 졸업하면서 다행히 표와 멀어졌지만 표가 남긴 상처는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다.

현재 ‘잉여’로 살고 있는 치타가 ‘왕따’로 살던 과거를 회상하는 영화의 첫 장면. 얼어붙은 저수지를 끝까지 건너면 더이상 괴롭히지 않겠다고 표가 말한다. 왕따당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치타가 한발 한발, 얼음 위를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밑의 얼음이 불안한 소리를 낸다. 빠지직, 빠지직…. 치타가 나직이 되뇌기 시작한다. 타, 파, 피, 카, 타, 파, 피, 카…. 나중에 치타는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익명의 상대한테만 그 뜻 모를 중얼거림의 비밀을 살짝 털어놓는다. “그건 뭔가요? 소원을 이루는 주문인가요?” “아뇨, 그냥 저만의 파이팅이에요. 타, 파, 피, 카, 타, 파, 피, 카….”

바지까지 벗겨진 채로 한겨울 칼바람 속에서 얼음 위를 서성이던 치타가, 결국 저수지 건너는 걸 포기하고 뒤돌아 걸어 나오며 표의 비웃음을 사던 치타가 타, 파, 피, 카, 타, 파, 피, 카, 혼자만의 파이팅을 텅 빈 하늘에 잽처럼 던지는 장면은 참 측은하고 안쓰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유난히 춥고 길었던 치타의 ‘그해 겨울’을 오래 기억해주지 못했다. 그 뒤로 만난 수많은 영화 속 청춘들의 찬란한 봄날만 기억하느라 한동안 잊고 있던 치타였다. 그런데 어느 영화감독의 인터뷰가 다시 그의 안부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영화 프로젝트의 열번째 옴니버스 작품 <어떤 시선>(2013) 가운데 세번째 단편 <얼음강>을 연출한 민용근 감독.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어떤 시선’을 다룬 이야기에 꼭 ‘얼음강’이라는 제목이 필요한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날 얼어붙은 한강에 던진 돌멩이가 튕겨 나오는 모습에서,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이 단단하고 차가운 ‘얼음강’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어붙은 저수지의 치타와 얼어붙은 한강의 돌멩이. 치타는 얼음이 깨질까 두려워하고, 돌멩이는 얼음이 깨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지만 사실 둘은 같은 처지다. 혼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음강을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이기 때문이다. 언제 깨질지 모를 믿음 위에서 혼자 걷는 두려움을 아는 사람은, 언제 깨질지 기약 없는 편견을 향해 혼자 날아가는 막막함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소수자는, 사회의 약자는, 남과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은, 그렇게 저마다의 얼음강에서 혼자 춥고 긴 겨울을 견디며 매일 두려움 위를 걷고 매번 막막함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면 어떨까. 얼어붙은 강 위에 함께 오를 사람이 있다는 건 어떤 종류의 행복일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의 한 장면을 떠올려본다. 어느 겨울밤, 얼어붙은 찰스강 위에 나란히 누워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참 즐거워하던 두 사람. 겁이 많아 얼음강에 누워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조엘(짐 캐리)에게 클레먼타인(케이트 윈즐릿)이 용기를 주었다. 차가운 얼음강에 늘 혼자 눕던 클레먼타인에게 조엘은 온기를 주었다. 혼자였던 두 사람이 만나 얼음강 위에 나란히 누워 서로에게 용기와 온기를 건네던 그 순간을 우리는 ‘연애’라고 부른다. 누군가 치타와 함께 얼음강을 건너며 온기를 전해준다면 그 순간을 ‘연민’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돌멩이와 함께 얼음강에 부딪히는 용기를 낸다면 그 순간은 ‘연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날이 추워진다. 짧은 가을이 곧 끝날 것이다. 머지않아 강들은 머리에 얼음을 이게 될 것이다. 밀양에서, 대한문에서, 전국의 교단에서 유난히 춥고 긴 겨울을 맞이할 세상의 ‘치타’들이 이 꽁꽁 얼어붙은 시대를 적어도 ‘혼자’ 건너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단단하고 차가운 편견에 부딪혀 튕겨 나온 소수의 ‘돌멩이’들이 최소한 혼자 나뒹구는 겨울은 아니었으면 한다. 타, 파, 피, 카, 타, 파, 피, 카…. 우리만의 파이팅이 필요하다. 지금 얼음강을 건너는 치타에겐 그 어느 때보다 타잔의 밧줄이 간절하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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