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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잉여야말로 창조적 인간…영화도 만들었잖아요?”

등록 2013-11-07 20:13

“이렇게 하면 잉여처럼 보일까요?” 지난달30일 서울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신문사에 모인 이호재(왼쪽부터), 장현상, 엄태화 감독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어색한 듯 막 입대한 ‘이병’ 같은 자세를 취하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렇게 하면 잉여처럼 보일까요?” 지난달30일 서울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신문사에 모인 이호재(왼쪽부터), 장현상, 엄태화 감독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어색한 듯 막 입대한 ‘이병’ 같은 자세를 취하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문화‘랑’] ‘잉여’ 감독 3인의 ‘잉여 이야기’
티브이, 웹툰, 영화 속에서 ‘잉여’는 이제 새로운 문화코드로 자리잡고 있다. 나머지도 아니고, 쓸모없는 인간도 아니지만 무슨 대단한 똥폼 잡기도 싫다! 영화 3편의 젊은 감독들이 ‘잉여’를 위해 펼친 재기발랄한 변론을 들어보자.

댓글로 남을 공격하는 ‘키보드 워리어’짓을 일삼다 인터넷에서 시비가 붙은 상대에게 실제로 흠씬 두들겨 맞고 복수하겠다고 달려드는 태식(<잉투기>). 너무 게을러 밥 먹는 것도 컴퓨터도 모두 침대 위에서 해결하는 무기력한 영화학도 호재와 친구들(<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왕따에 대학 입시 따윈 상관없이 수업시간에 만화만 그려대는 하늘(<네버다이 버터플라이>).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취업이나 입시에 실패하고 집에서 게임이나 하는 내 동생, 내 자식, 혹은 나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20~30대 젊은 감독 3인이 이런 ‘나와 우리들’의 모습을 ‘잉여’라는 열쇳말로 담은 영화를 들고 관객들을 찾아왔다. <잉투기> 엄태화(32),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이호재(28), <네버다이 버터플라이> 장현상(26) 감독. 스스로도 ‘잉여’임을 자처하는 3인3색 잉여 감독들이 지난달 30일 <한겨레> 신문사에 모여 앉았다. 이들은 “‘20~30대 젊은이 4명 중 1명이 자신을 잉여라고 생각한다’는 최근 통계가 보여주듯, 잉여는 하나의 사회적·문화적 현상이 된 지 오래”라며 “공교롭게 비슷한 시기 잉여를 다룬 영화 3편이 만들어지며 관심이 쏟아지는 듯하다”고 했다.

나는 왜 잉여인가?

이 감독들은 정말 ‘잉여’일까? 자신이 잉여임을 증명(?)해 달라고 했다. “벌레가 죽은 사진을 예술적으로 찍어 싸이월드나 페이스북에 올렸어요. 사진들을 버리긴 아까워 제 돈으로 사진집을 만들고 30권 찍어 친구들에게 나눠줬죠.”(장현상) “20일 동안 작업실을 비웠다 돌아왔더니 함께 영화를 찍은 동생들이 선물이라며 뭔가를 내밀어요. 치킨 쿠폰 20장. 단 하루도 햇볕을 보지 않고 치킨을 시켜 먹으며 게임만 했대요. 저도 동참했죠.”(이호재) “자취하며 친구들과 컴퓨터 한 대를 놓고 4명이서 릴레이로 게임만 했어요. 한 사람이 지쳐 쓰러져 자면 자다 깬 사람이 이어받는 방식으로. 정신을 차려보니 몇 주가 지났더라고요.”(엄태화)

세 감독은 직접 해봤던 최고의 잉여짓을 털어놓더니 “존경스럽다”며 서로를 칭찬했다. ‘나도 잉여짓 해 볼 만큼 해봤지만, 당신도 만만치 않다’는 투다. 그러면서도 “잉여력 높은 고수의 눈에 우리는 ‘잉여 흉내 내는 놈’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겸손(?)을 떤다. 사실 영화계는 잉여들이 가장 많이 모인 곳 중 하나라고 입을 모았다. 누군가 “요즘 뭐 하냐”고 물을 때 “시나리오 써, 작품 구상 중이야”라고 답하면 상대도 “아~ 그래?”라고 쉽게 수긍을 하기 때문이란다.

 왼쪽 부터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이호재(28), <네버다이 버터플라이> 장현상(26), <잉투기>엄태화(32), 감독
왼쪽 부터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이호재(28), <네버다이 버터플라이> 장현상(26), <잉투기>엄태화(32), 감독

“잉여는 생산적 인간형”

사전적으로 ‘나머지’를 뜻하는 ‘잉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쓸모없는(인간)’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인다. 이들은 이런 정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왕따라는 말이 없었을 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아이도 어떤 계기로 다시 어울릴 수 있었는데, 왕따로 규정되면서 아예 그런 기회조차 없어졌어요. 잉여도 비슷한 것 같아요.”(엄태화) ‘엑스세대’, ‘신세대’ 등 명명을 좋아하는 ‘그들(주류)’이 20~30대 태반이 잉여인 요즘 세대를 ‘잉여세대’로 이름붙이고 싶어하는 듯하단다. “취업 못하면 잉여라고 비난하며 ‘눈높이를 낮추’래요. 맘대로 시스템을 만들고, 그에 맞추려면 눈을 낮춰라? 저는 ‘눈높이를 넓히라’고 말하고 싶어요. 시스템 밖에서 얼마든지 재밌고, 의미있게 살 수 있으니까요.”(이호재) “사실 잉여는 창조적 인간형이에요. 시간이 많으니 별 기발한 생각을 다 하죠. 돈 못 벌면 비생산적이라는 건 그들(주류) 생각이고.” 장현상 감독도 말을 보탰다. 인터넷 키보드 워리어들이 실제로 모여 격투를 벌이는 내용의 영화를 찍으며 인터넷 서핑을 많이 했다는 엄태화 감독. 그는 “디씨갤(디씨인사이드 갤러리)에 가면 아티스트 못지않은 영상을 올리는 잉여 고수들이 많다”며 “그들이 영화 찍겠다고 나서면 어쩌나 두려움마저 느꼈다”고 했다. 잉여는 생산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생산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 시대 문화코드가 된 잉여

요즘 잉여는 주요한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코미디 프로그램(<개그콘서트> ‘오성과 한음’)과 웹툰(<미생>), 이말년 만화가의 소재가 되고, 잉여를 학문적으로 분석한 책(<속물과 잉여>, <잉여사회>)까지 나왔다. 세 감독들은 이를 ‘신기하고 재밌는 현상’이라고 했다. “역설적이지만 잉여 문화를 소비하고, 잉여짓에 열광하는 사람들 중 주류도 많아요. 높은 연봉에 번쩍번쩍한 차를 타도 지루하고 불만족스러운 거죠. 잉여들이 하는 짓을 보면서 대리만족 하는 거예요.”(이호재) “잉여들은 순수하게 재미를 위해 ‘병맛짓’(어이없고 맥락없는 짓)을 하고 더 수준 높은(?) 잉여짓에 감탄하며 무릎 꿇어요. 주류는 이걸 잠시 소비하거나 심지어 돈벌이로 이용하죠.”(장현상)

잉여를 소비하는 주류를 비웃지만 영화를 개봉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 주류(대기업)의 시스템에 편입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져봤다. “그게 왜 문제가 되죠? 우리는 주류의 시스템을 이용해 ‘잉여짓’을 하는 건데…. 전 이걸 ‘잉여들의 역습’이라 부르고 싶어요. 하하하.”(이호재)

“영화감독? 우린 영원한 잉여”

‘영화’라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감독님’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이제 잉여가 아닌 것은 아닐까? 진짜 잉여들이 보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 이호재 감독은 자기 영화가 잉여들에게 ‘저런 놈도 뭔가 해냈는데, 넌 뭐하냐?’는 식의 또다른 ‘억압’이 될까 걱정이라고 했다. 또 영화를 찍었다는 이유로 갑자기 ‘호의적’이 된 남들의 시선도 부담스럽단다. “영화 찍은 뒤에도 전 너무 게을러 몇 달 동안 일을 하나도 안 했어요. 웃겨요. 전 변한 게 없는데, 영화 찍기 전엔 손가락질하더니 이젠 대단하대요.”

장현상 감독이 말을 이어받았다. “잉여는 탈출하거나 벗어나야 할 영역이 아녜요. 이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중 나쁜 놈은 안 되겠지만, 계속 이상한 놈(잉여)으로 살 것 같아요.” 엄태화 감독은 영화를 찍는 것이 좀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는 될 수는 있겠다 싶단다. 사람답게 사는 게 뭐냐고 물었다. “저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밥은 좀 안 얻어먹는 것? 히히.”


세 영화, 어떤 내용 담고 있나

잉투기
잉투기

잉투기 감독 한마디 “인터넷 속 실존 인물들을 모델로 한 재밌지만 짠한 영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칡콩팥’이라는 별명으로 활동하는 태식은 같은 커뮤니티에서 사사건건 대립했던 ‘젖존슨’에게 현실에서 급습을 당한다. 흠씬 두들겨 맞는 모습이 인터넷에 퍼져 망신을 당한 태식은 젖존슨에게 복수하기 위해 종합격투기를 배우러 갔다가 관장의 조카 영자를 만난다. 인터넷 먹방(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송)에 빠진 영자는 태식을 도와 젖존슨 찾기에 나선다. 태식은 인터넷 잉여들이 실제 격투를 벌이는 ‘잉투기’ 대회에 대해 알게 되고, 이 대회에서 젖존슨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14일 개봉.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감독 한마디 “시작부터 끝까지 히치하이킹(잉여) 정신으로 만든 영화.”

학교에 적응을 못하고 게으름만 피우는 영화학도 호재, 하비, 현학, 휘. 게으름에 지친 4명은 학교를 그만두고 단돈 80만원과 카메라 한 대 들고 무작정 유럽 여행을 떠난다. 4인방은 숙박업소 홍보영상을 찍어주고 무료숙식을 제공받아 1년 동안 유럽 일주를 하고 가수를 발굴해 뮤직비디오 한 편을 찍은 뒤, 이 모든 과정을 다큐로 만들겠다는 다소 허황된 목표를 세운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파리에서 빈털터리가 되고 일거리를 찾지 못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게 된다. 28일 개봉.

네버다이 버터플라이
네버다이 버터플라이

네버다이 버터플라이 감독 한마디 “한때 우리의 모습이었을, 잉여들이 펼치는 난장에 흠뻑 빠져보시길.”

학교 ‘짱’에게 매일 두들겨 맞는 전교 왕따 하늘. 대학입시는 코앞인데, 수업시간에는 만화나 그리며 시간을 때운다. 그러나 고3 시작과 동시에 유학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전학생이자 싸움짱 명호를 만나면서 모든 삶이 바뀐다. 명호 일당은 하늘의 만화 솜씨를 바탕으로 인터넷 성인만화 사이트를 열기로 의기투합하고, 명호의 집에 아지트를 만든다. 그러나 하늘은 성인만화 사이트의 주요 정보가 담긴 유에스비를 분실하며 위기에 빠진다. 현재 상영중.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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