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배한성
형사 가제트·이소룡·알 파치노 등
성우인생 45년간 2만여명 연기
4년만에 극장영화 ‘다이노…’ 더빙
“아이돌에 밀려 성우자리 줄었지만
시대의 흐름…성우가 더 노력해야”
성우인생 45년간 2만여명 연기
4년만에 극장영화 ‘다이노…’ 더빙
“아이돌에 밀려 성우자리 줄었지만
시대의 흐름…성우가 더 노력해야”
그를 만나는 것 자체가 만화 같은 일이었다. 눈앞에서 형사 가제트가 “나와라, 만능팔!”을 외치고, 불가능을 몰랐던 특수요원 맥가이버가 “우리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지”라는 명대사를 읊조리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4일 서울 여의도 한 호텔에서 만난 성우 배한성(사진)은 1980년대 이후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세대들한테 무수한 영화나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을 관객들과 만나게 해준 인물이다. 그가 45년간 성우 생활을 하면서 목소리 연기를 한 인물만 2만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성우들한테는 흔히 ‘천의 목소리’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관객들한테 그는 ‘2만개의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인 셈이다. 어느새 67살이 된 그가 최근 방송 활동을 줄인데다, 더빙 영화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은 탓에 초등학교 3학년인 손녀조차 할아버지가 얼마나 유명했던 사람인지 잘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더빙 영화가 전성기이던 시절 그는 대중들한테 성룡이자 이소룡이었고 우디 앨런, 알 파치노,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레드퍼드, 모건 프리먼이었다.
그가 19일 개봉하는 영화 <다이노소어 어드벤처 3D>에서 공룡새 ‘알렉스’ 역을 맡아 모처럼 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영화 <다이노소어…>는 파키리노사우루스 공룡 무리 속에서 작고 어린 공룡 파치(목소리 이광수)가 난관을 이겨내며 리더로 성장해 흉악한 포식자 고르고사우루스한테서 동료와 가족들을 지킨다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이다. 알렉스는 파치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 역할이다.
2009년 <오션스> 이후 4년 만에 극장용 영화 더빙에 나선 그는 “앞으로 세상은 창의력이 지배한다고 하던데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며 “그래서 이번엔 캐릭터 창출뿐 아니라 관객들의 공상·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연기를 고민했다”며 호기심을 자극했다. 공상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목소리’란 어떤 것일까?
“내가 녹음을 하고도 목소리가 너무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다른 방식으로 실험을 거듭해 풍성한 목소리를 만들거든요. 시청자의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것도 연기 목표로 맞추고, 그 느낌이 날 때까지 모든 연기 기술을 동원해 끊임없이 시도를 해보는 거죠.”
최근 극장 개봉용 애니메이션에서 전문 성우들은 아이돌 스타들에 밀려 목소리 연기에서 자리를 잃어온 게 사실이다. 아쉬움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뜻밖에 그는 “요즘 ‘콜라보레이션’이란 말이 유행처럼 쓰이는데, 다른 영역 사이에 ‘어울림’은 시대의 흐름인 것 같다. 섭섭한 부분이 있지만 성우들이 다른 분야의 예술인들이 근접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영역을 구축하거나, 대중들한테 스타로 대접받는 성우들을 키우는 방식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더빙 영화를 더 재밌게 즐기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물음에도 그는 비슷한 대답을 했다. “관객들은 아무 준비가 없어도 좋습니다. 감동을 주는 역할은 성우들이 할 일이지, 관객들이 감동을 받기 위해 뭔가를 필요로 하게 하면 안 됩니다.”
그는 “시청자들의 높아진 수준에 맞춰 성우들의 노력이 여전히 부족하다. 나도 그런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요즘 드물게나마 극장 영화 더빙을 하면서 ‘영화는 이게 마지막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자주 한다고 했다. “목소리가 인체 기관 중 가장 늦게 노화가 진행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낡아질 수밖에 없는 신체의 일부분이고, 그 한계는 내가 잘 알고 있어요.”
이런 이유 때문인지 최근엔 서울예술대학교 방송영화학과에서 학생들한테 수십년간 쌓아온 경험과 지혜를 가르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강의하기에 목소리는 아직 괜찮잖아요? 좋은 콘텐츠를 가르치기 위해서 지금도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요. 지금 나이에 걸맞은 역할이 어떤 것일까에 대한 고민과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죠.” 글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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