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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가족의 일상에서 들춰낸 폭압적 권력구조

등록 2014-04-03 19:49수정 2014-04-06 21:48

영화 <은밀한 가족>은 한 소녀의 죽음을 통해 평화로운 가족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폭력과 위선, 감시와 처벌로 얼룩진 본모습을 폭로한다.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감독의 고국인 그리스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한 편의 은유이기도 하다. ㈜엔케이컨텐츠 제공
영화 <은밀한 가족>은 한 소녀의 죽음을 통해 평화로운 가족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폭력과 위선, 감시와 처벌로 얼룩진 본모습을 폭로한다.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감독의 고국인 그리스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한 편의 은유이기도 하다. ㈜엔케이컨텐츠 제공
[문화‘랑’] 영화
‘은밀한 가족’의 끔찍한 폭로
평온 뒤에 숨겨진 감시와 처벌
개인의 인간성 파괴 과정 그려
구성원의 침묵이 악순환 부른
부패한 그리스 사회 꼬집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린다. 거실에서는 11번째 생일을 맞은 안젤리키의 생일파티가 한창이다. 음악이 흐르고 생일 케이크가 준비되는 와중에 주인공인 안젤리키는 베란다 난간에 조용히 걸터앉는다. 순간 입가에 엷은 미소가 비친다. 그리고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난간에서 몸을 날린다. 도대체 왜 소녀는 어린 나이에, 그것도 자신의 생일날 ‘자살’을 했을까?

영화 <은밀한 가족>은 다소 충격적인 첫 장면을 시작으로 수상한 가족들의 일상을 조금씩 조금씩 파고들며 관객들이 가질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함께 찾아나간다.

소녀가 죽은 뒤 가족들은 상실감에 빠지지만, 가장인 할아버지는 아내와 첫째딸 엘레니, 둘째딸 미르토와 손자·손녀를 돌보며 의연하게 가족을 지켜내려 한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일상이 계속된다. 손자·손녀를 등하교시키고, 성적까지 챙기는 등 얼핏 보면 세심한 가장의 모습.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의 일상은 오직 할아버지에 의해 철저히 계획되고 통제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친구 집 방문, 저녁식사 시간, 숙제를 끝낸 뒤 놀이 방법까지 가족의 모든 행동은 권위적인 할아버지의 판단에 따라 이뤄진다. 그리고 규칙의 준수 여부에 따라 철저히 상과 벌이 주어진다. 할아버지는 가장의 권위를 세우고 가족을 감시하기 위해서라면 생계의 근원인 직장마저도 손쉽게 그만둔다. 가장이 직장을 잃는다면 대체 이 가족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해갈까? 이 대목부터 영화는 상상조차 못했던 ‘은밀한 진실’을 하나하나 드러내며 충격적인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 <은밀한 가족>의 한 장면. ㈜엔케이컨텐츠 제공
영화 <은밀한 가족>의 한 장면. ㈜엔케이컨텐츠 제공

영화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가족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폭력과 위선, 감시와 처벌로 얼룩진 본모습을 폭로한다.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로, 사랑과 믿음에 기반해야 할 가족이라는 이름이 잉태한 끔찍하고 폭압적인 권력 구조 속에서 구성원 개개인의 인간성이 어떻게 파괴돼 가는가를 조용히 그려낸다.

가장인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정신적·성적으로 학대하고 수탈한다. 그렇다면 왜 구성원들은 달아나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가? 폭력과 억압이 고착되면서 가족들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묵인한다. 그리고 이 외면과 묵인은 체제(구조)를 더욱 공고히 한다. 더불어 폭력은 가족 전체에 전이되고 대물림된다. 할머니는 옷 투정을 하는 손자·손녀에게 “닥치고 주는 대로 입으라”고 소리치고, 엄마는 “왜 이렇게 늦었냐”고 묻는 여동생의 얼굴을 후려친다. 할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무표정한 얼굴로 오빠의 뺨을 치는 손녀 알크미니의 모습에 이르면 소름이 끼친다.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폭력은 침묵에서 온다”고 했던가. 첫 장면에 등장한 안젤리카의 자살이 할아버지의 비윤리적 행태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침묵’에서 비롯됐음을 관객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올해 37살인 그리스의 신예감독 알렉산드로스 아브라나스는 두번째 작품인 이 영화로 지난해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거머쥐었다. 그는 “영화 속 가족의 모습을 통해 국가 부도위기에 처한 그리스의 상황을 은유하려 했다”고 밝혔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부패하고 비윤리적인 정치인들에게 계속 투표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에 침묵하는 그리스의 현실을 꼬집으려 한 것이다.

어디 그리스뿐이랴. 국가기관이 간첩 사건의 증거를 조작하고, 개인의 사생활을 마구 파헤치는 비정상적인 권력남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 역시 이 영화의 ‘은유’에 맞아떨어진다.

영화는 첫머리와 끝머리에 ‘자살’과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지를 배치한다. 하지만 죽거나 죽인다고 폭력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열려 있던 문이 다시 굳게 잠기는 마지막 장면처럼 폭력과 권력은 끝이 없다. 전이되고 되풀이되고 공고화될 뿐이다. 제멋대로 뒤틀린, 불의한 권력에 함께 저항하지 않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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