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복무를 마친 현빈의 스크린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영화 <역린>이 베일을 벗었다. 후반부 스타일리시한 액션 장면이 돋보이지만, 중반부까지의 전개가 너무 느슨하고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제기된다. 올댓시네마 제공
[문화‘랑’] 영화
정조 소재 이재규 감독 데뷔작
16부작 드라마 압축한 느낌
깊이와 설득력 갖추지 못해
평면적인 캐릭터도 아쉬움
정조 소재 이재규 감독 데뷔작
16부작 드라마 압축한 느낌
깊이와 설득력 갖추지 못해
평면적인 캐릭터도 아쉬움
우리 역사에 극적인 삶을 산 군주가 한둘이 아니지만, 정조만큼 드라마틱한 왕이 또 있을까.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하고, 우여곡절 끝에 25살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평생 암살 위협에 시달린 그다. 조정을 장악한 노론과의 대립 속에서 왕권 강화, 인재 육성, 신분차별 철폐 등 개혁을 이뤄냈지만, 쉰이 채 안 돼 맞은 죽음마저 독살설이 제기되는 등 그의 삶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다. 정적 심환지와 주고받은 비밀편지가 2009년 공개되면서 새로운 의문점을 던지기까지 했으니, 20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미스터리한 왕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정조의 삶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변주해왔다. 이인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영원한 제국>(1995)부터 <문화방송> 드라마 <이산>(2007~2008), <한국방송> 드라마 <한성별곡-정>(2007), <채널 씨지브이> 드라마 <정조 암살 미스터리-8일>(2007), 정조의 생애에서 가장 화려했던 순간인 화성행차를 3D 영상으로 재현한 다큐멘터리 <의궤-8일간의 축제>(17일 개봉)까지.
정조를 소재로 한 작품 목록에 이름을 보탤 또 한 편의 영화가 관객을 찾아간다. 오는 30일 개봉하는 <역린>.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린 자는 반드시 화를 입는다는 고사성어를 제목으로 내걸어 왕의 노여움, 정조의 대반격을 그렸음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킨다. 군 복무를 마친 현빈의 스크린 복귀작인데다, 정재영, 조정석, 조재현, 김성령, 한지민, 박성웅 등 이름값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해 기대작으로 꼽혔던 <역린>이 마침내 지난 22일 시사회에서 베일을 벗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를 배반하는 쪽에 가깝다.
영화는 정조 즉위 1년인 1777년 7월28일 벌어진 정유역변을 모티브로 삼았다. 잠 못 이루던 정조가 서고이자 침전인 존현각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지붕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조사해보니 자객이 침투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이 사건과 연루된 자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만화 <창천수호위> <버디> 등에서 이현세 작가와 함께 작업했던 최성현 스토리 작가는 정유역변의 단 하루 24시간을 뼈대 삼고 살을 붙여 각본을 만들어냈다. 드라마 <다모> <베토벤 바이러스> <더킹 투하츠> 등으로 명성을 얻은 이재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감독으로 첫 데뷔작이다.
장편 시리즈 문법에 익숙한 이들이 극본과 연출을 맡아서일까? 영화는 2시간 남짓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걸 담으려는 ‘의욕의 과잉’을 드러낸다. 하지만 어느것 하나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채 막을 내린다.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정조(현빈)의 내적 갈등, 왕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할머니 정순왕후(한지민)와 왕을 지키려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김성령)의 궁중암투, 정조와 그의 그림자 같은 존재인 환관 상책(정재영)의 교감, 왕의 목숨을 노리는 청부살인업자인 살수(조정석)의 과거, 또 살수와 궁녀 월혜(정은채)의 로맨스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무수한 가지를 뻗지만 각각의 소재가 깊이와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채 겉만 훑고 마는 느낌이다. 물리적 시간의 한계가 분명한 한편의 영화에 16부작 장편 드라마를 무리하게 압축한 결과라는 평도 나온다.
중반부까지 24시간 중 상당 시간을 느슨하고 헐겁게 흘려보내던 이야기는 후반부 존현각 액션신으로 치달으며 다소 긴장감과 활기를 불어넣는다. 이재규 감독의 장기인 스타일리시한 화면이 속도감 있는 액션과 맞물리면서 관객의 심박수를 높인다. 이런 속도감을 영화 초반부터 고조시켜 나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미국 드라마 등을 통해 이미 하나의 전형이 된 ‘24시간’ 설정에서 뽑아낼 수 있는 재미 요소를 살리지 못한 듯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무난한 편이지만, 아쉬운 대목도 많다. 내면의 갈등을 좀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연기를 한 현빈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일관된 모습을 보이며 영화를 단조롭게 끌고 간다. 냉정한 킬러로 변신한 조정석,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한 한지민도 마찬가지다.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가 잘 읽히지 않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력 때문이라기보다 지나치게 평면적인 캐릭터의 역할 탓으로 보인다. 정재영이 맡은 환관 상책이 그나마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영화 <역린>의 정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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