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개봉하는<논픽션 다이어리>는 1994년 가을 전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지존파 연쇄살인과 성수대교 붕괴,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등 일련의 대형 사건·사고를 통해 한국형 자본주의의 이면에 감춰진 어두운 그림자를 파헤친 다큐멘터리다. 진진 제공
[문화‘랑’] ‘논픽션 다이어리’ 17일 개봉
지존파·성수대교·삼풍백화점…
압축성장과 속도주의 매몰된
한국형 자본주의에 대한 기록
인터뷰·비보도 영상 함께 엮어
지존파·성수대교·삼풍백화점…
압축성장과 속도주의 매몰된
한국형 자본주의에 대한 기록
인터뷰·비보도 영상 함께 엮어
1994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 ‘별이 빛나는 밤에’, ‘삐삐’ 등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영향으로 우리는 1994년을 낭만과 향수로 기억한다. 하지만 여기 또다른 방식으로 1994년의 기억을 호출하는 영화가 있다. 오는 17일 개봉하는 <논픽션 다이어리>는 추억이라는 달콤한 이름 뒤에 감춰진 그 시절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는 ‘살인의 탄생’이라는 부제에 맞게 1994년 추석을 앞두고 온 국민을 충격과 경악 속으로 몰아넣었던 ‘지존파 사건’(94년 9월12일)부터 재조명한다. 5명을 납치·감금하고 토막 내 살해한 뒤 시체를 불에 태운 6명의 일당.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 살인을 저질렀다”, “부자를 더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말하며 태연하게 웃기까지 한다. 이어 영화는 여고생 등 32명의 사망자를 낸 성수대교 붕괴사건(1994년 10월21일), 502명의 사망자와 937명의 부상자를 낸 삼풍백화점 사건(1995년 6월29일) 등을 차례로 더듬어 나간다.
대체 이 사건들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영화는 ‘지존파 사건’을 자본주의의 모순을 범행 동기로 공표한 최초의 연쇄살인이자, 한국의 압축성장 과정에 내재된 계급적 갈등의 상징으로 정의한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역시 속도주의에 매몰된 한국형 자본주의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참담한 사건으로 규정한다. 지존파는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10억을 모으려 했고, 삼풍백화점 사장은 1조원을 모으려 했다. 결국 이 모든 사건은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살인행위’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살인’에 대한 대가는 무엇인가. 지존파는 사건 1년여가 지난 1995년 사형을 당해 죗값을 치렀다. 하지만 나머지 사건에서는 죽은 자는 있지만, 죽인 자들은 없다. 정부는 오직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치안 안정’을 외치며 공권력 강화에만 힘을 쏟는다. 지존파 사형집행이 빠르게 이뤄진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되짚어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시선을 좀더 확장한다. 1995년 11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군 형법상 반란수괴죄 등으로 구속 기소되고 다음해 사형(노 전 대통령은 징역 12년)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지존파보다 수십 배나 많은 사람을 죽인 이들은 ‘국민대통합’을 명분으로 사면받아 처벌을 피해간다. 영화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 더 나아가 국가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단죄를 하는 사법제도와 사형제도 자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진다.
영화는 지존파 사건과 삼풍백화점 사건을 담당했던 고병천 형사, 지존파가 복역했던 구치소의 정형복 교도관, 지존파를 전도했던 목사와 수녀,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 김형태 변호사 등을 폭넓게 인터뷰하고 사건 당시의 비보도 영상들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는 기법을 택한다. 이를 통해 일련의 사건들이 사회·경제·문화적으로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과 상호작용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범죄 다큐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결국 이 영화는 한국의 정치·사회·역사에 관한 치밀한 기록이자 보고서인 셈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작품이 단순히 한 시대를 갈무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년이 지났지만 대학생 등 10명이 사망한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 안산 단원고 학생 등 사망자 293명(실종자 11명)이 발생한 세월호 참사 등 우리는 지금도 제2, 제3의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사건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죄의 대가를 치르는 데 있어서는 1994년과 달라지기를 바라지만, 그 역시 요원한 일인 듯해 가슴이 답답하다. 결국 ‘살인마’는 악의로 가득한 개인이라기보다는 그 시대의 자화상인 것이다. 정윤석(32) 감독은 “한국 사회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기획하게 됐다”며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어, 과거의 사건을 통해 더 나은 미래로 전진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인 비프메세나상, 2014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최우수 아시아 영화상인 넷팩상 등을 받았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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