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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일본의 간송’ 고군분투 역정, 스크린에 오롯이

등록 2014-08-14 19:39수정 2014-08-15 13:55

다큐 영화 <정조문의 항아리>를 만든 최선일 프로듀서(왼쪽부터)와 황철민 감독, 최광희 작가. 이들은 “정조문 선생의 삶을 통해 우리 문화, 우리 뿌리 등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갖길 바란다”며 “특히 젊은 세대들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다큐 영화 <정조문의 항아리>를 만든 최선일 프로듀서(왼쪽부터)와 황철민 감독, 최광희 작가. 이들은 “정조문 선생의 삶을 통해 우리 문화, 우리 뿌리 등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갖길 바란다”며 “특히 젊은 세대들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문화‘랑’] 다큐멘터리 영화 ‘정조문의 항아리’
교토의 고려미술관을 아시나요? 재일동포 1세 정조문은 조선백자 항아리로 민족의 자부심을 되찾았습니다. 한국인들은 모르고 일본인들이 더 기억하는 그의 삶이 지금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조선은 많은 침략을 겪었기에 그 문화 역시 슬프고 애잔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언제나 일어나 싸워 이겨냈습니다. 그래서 조선 도자기에서는 씩씩하고 당찬 기운이 넘칩니다. 내가 조선 도자기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재일동포 1세로 일본에 흩어져 있는 조선의 문화재를 수집해 일본 교토에 ‘고려미술관’을 세운 고 정조문(1918~1989) 선생. 한국에서 ‘문화재의 아버지’로 간송 전형필을 꼽는다면, 정조문은 ‘일본의 간송’으로 불릴 만한 인물이다. 해방과 분단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잊힌 정조문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정조문의 항아리>가 최근 제작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서 약탈해간 문화재 목록을 고의로 은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밀반출 문화재 환수’ 여론이 들끓는 요즘, 이미 수십년 전 한반도의 문화재를 수집해 우리의 얼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정조문 선생의 삶이 새삼 잔잔한 감동을 준다. 지난 11일 영화 <정조문의 항아리>를 기획·제작한 불교미술사학자 최선일 박사, 황철민 감독(세종대 교수), 최광희 작가(영화평론가)를 마포구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일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
1700여점 수집해 고려미술관 개관
직접 유물 만지면서 감상토록 해
석탑 구입하려 30년 설득한 일화도
“통일되면 조국에 기증하라” 유언

올 부산국제영화제 출품 목표로
300여명 후원 받아 영화 제작중

최선일 박사는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정조문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구입한 조선백자였다. “이 소박한 항아리를 만나면서 문화재에 대한 정조문 선생의 사랑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어요. 영화의 제목도 바로 이 백자에서 따온 것입니다.”

정조문은 경북 예천군에서 태어나 6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구 선생 밑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정진국) 탓에 형편이 어려워지자, 그는 초등학교 3년만 마치고 막노동 등을 전전하다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었다. 재일 조선인으로 차별과 억압에 시달렸던 그는 ‘왜 나는 조선인으로 태어났을까’라며 한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토 고미술상가 거리에서 조선백자를 우러러보는 일본인들을 보며, 그는 난생처음 한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느꼈다. 당시 돈으로 집 한 채 값이 훌쩍 넘는 이 항아리를 ‘할부’로 구입했고, 이후 평생 우리 문화재 수집에 힘썼다. 그는 보통의 수집가들과 달리 재산가치가 있는 문화재만이 아니라 목가구 등 생활용품과 민화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삶과 연관된 것은 무엇이든 모았다. 교토의 한 밭에 방치된 석탑을 사기 위해 소유자인 아버지와 그 아들을 대를 이어 30년 동안 설득한 일화는 그의 집념을 잘 보여준다.

그의 삶을 영화로 만드는 데 첫 돌을 놓은 사람이 최선일 박사다. 10여년 전 처음 ‘고려미술관’에 방문했다가 정 선생의 삶에 매료됐다. “엔에이치케이(NHK)가 박물관 개관 당시 정 선생을 인터뷰한 필름을 보게 됐죠. ‘한국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분의 삶을 내가 꼭 되살리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렇게 영화화를 결심한 최 박사가 황 감독을, 황 감독은 사학을 전공한 최 작가를 ‘섭외’했다.

막상 영화를 만들자니 ‘돈’이 가장 큰 문제였다. “허리띠를 졸라매면 5000만원이면 되겠지 했어요. 최 박사가 지난해 쓴 <정조문과 고려미술관>이라는 책이 800권 팔렸으니 이 책을 사 본 사람들은 최소한 정조문을 알지 않겠나, 10만원씩 500명한테 모금하자고 생각했죠.”(황 감독) 자발적인 참여자들이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거의 다단계나 피라미드에 버금가는” 모금활동을 펼쳤다. 특이한 점은 후원자 300명 가운데 3분의 1이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잊혔지만, 일본에는 고려미술관을 찾는 선생의 ‘팬’들이 꽤 많기 때문”(최 작가)이다. 티저영상, 해금 연주, 타이틀 제작 등을 통한 ‘재능기부’도 이어졌다. 고은 시인이 추진위원장을 맡는 등 문화예술인들도 힘을 보탰다.

모금만큼이나 힘들었던 부분은 바로 촬영. 제한된 예산으로 일본 올 로케 촬영을 하느라 이들은 3박4일, 4박5일 등 일정을 쪼갰고, 단 3차례 일본을 방문해 모든 촬영을 마쳤다. 황 감독은 촬영에 얽힌 우여곡절도 쏟아냈다. “돈을 아끼려 촬영 장비를 이고 진 채 지하철과 버스로 이동하고 버스 안에서 쪽잠을 잤죠.” 반신반의하던 유족도 이런 노력에 차츰 마음의 문을 열었다. 유족이 선생이 살아계실 때 찍었던 홈비디오 6시간 분량 13개를 공개해준 것이 영화에 큰 도움이 됐다고 최 박사는 설명했다.

목기러기를 들고 이야기중인 생전의 정조문 선생. 고려미술관 제공
목기러기를 들고 이야기중인 생전의 정조문 선생. 고려미술관 제공
황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대마도 촬영’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정 선생은 자주 대마도 센뵤마키산에 올라 바다 건너 부산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선생의 아들·외손녀 등과 함께 그런 대마도를 찾은 것이다. “정 선생은 그토록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어요. 당시 재일동포들은 친북계 조직인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과 가깝게 지냈어요. 남한을 방문하면 북한의 가족에게, 북한을 방문하면 남한의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우려한 탓이죠. 분단이 낳은 비극이에요.” 정 선생은 가족들에게 “단 한 점의 문화재도 유산으로 남기지 않겠다. 나중에 통일되면 통일조국에 기증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죽음을 예감한 듯 사망 직전인 1988년 자신의 집에 그간 모은 1700여점의 유물을 소장할 ‘고려미술관’을 개관했다. “문화 앞에 나라라는 건 의미가 없다. 정치를 떠나 민간인의 문화교류를 통해 우리가 하나의 민족임을 깨달을 수 있다”고 정 선생은 늘 말하곤 했다. 그는 일본 안에 고려미술관이라는 ‘통일조국’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재일동포들에게 진정한 조국의 모습을 가르쳐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선생을 ‘영웅’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의 삶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서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애썼던 재일동포 1세대의 고군분투, 그리고 이제는 뿌리를 잊고 사는 2~3세대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고 싶었어요.”(최 작가) 그래서 영화는 정조문을 가깝게 알고 지냈던, 이제는 다들 80살이 넘은 동료들의 ‘회상’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는 당대 최고 지식인 일본 소설가 시바 료타로, 시인 김시종, 역사학자 이진희 등과 교류했다. 이들은 초등학교 3년이 정규교육의 전부였던 정조문을 ‘진정한 지식인’으로 대접했다.

정 선생은 고려미술관 방문객들에게 문화재를 만지면서 감상하도록 했다. 따뜻한 온기와 숨결을 직접 느껴보라는 뜻이었다. 문화재를 어루만지는 과정을 통해 선생은 재일동포들이 자연스레 스스로의 뿌리와 근원을 고민하길 바랐고, 통일된 조국의 형상을 느끼길 바랐다. “그런데 선생의 사후 25년이 지나도록 조국은 분단돼 있고, 재일동포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고려미술관을 찾는 연 1만명의 관람객 중 80% 이상이 일본인이고, 한국인들은 정조문이 누군지도 모르니…” 최 박사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영화는 촬영을 마무리하고 현재 음향·색보정 등 후반 작업을 남겨두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르면 연말, 늦어도 내년 상반기에 일반에 개봉할 예정이다. “정조문 선생의 일대기를 통해 후손들이 선생의 깊은 뜻을 깨닫고 우리가 지켜가야 할 가치에 대해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가 그 주춧돌을 놓기를 바라요.” 황 감독은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후원계좌: 외환은행 620-225640-476(예금주: 장미은)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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