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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신해철이 끝내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

등록 2014-10-31 19:18수정 2015-10-23 18:45

<바이센테니얼 맨>의 로빈 윌리엄스
<바이센테니얼 맨>의 로빈 윌리엄스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영화 <비긴 어게인>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내 앞엔 신해철이 앉아 있었다. 배철수 아저씨가 여름휴가 떠난 동안 잠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맡은 디제이(DJ)가 바로 그였다. 나는 월요일 코너 게스트로 그와 마주 앉았고, 음악 하는 사람 앞에서 ‘음악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지난 8월의 어느 날이었다.

“어떻게 보면 우직한 것이기도 하잖아요?” <원스> 다음 작품으로 <비긴 어게인>을 내놓은 존 카니 감독을 “영리하다”고 평한 나의 말끝에 그가 반문했다. ‘다른 장르도 자신있다’며 모험하다가 실패하는 감독도 있는데, ‘같은 장르라서 자신있다’며 한 번 더 음악영화를 만들어 성공한 존 카니는 영리한 사람이다, 그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해철은 그걸 ‘영리함’이 아니라 ‘우직함’으로 이해했다. “우직하게 자기 길을 가는 게 현명한 길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인 것 같아서 “되게 근사하게 들린다”고 그는 말했다. 나중에라도 그가 <비긴 어게인>을 보았는지, 보았다면 기대한 만큼 정말 ‘근사한’ 영화였는지, 이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일주일 뒤, 로빈 윌리엄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내 앞엔 신해철이 앉아 있었다. 배철수 아저씨가 자리를 비운 기간이 이레가 아니라 아흐레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마침 월요일 코너의 게스트인 덕분에 찾아온 행운. 수요일과 목요일 코너의 게스트들에겐 허락되지 않은 두 번째 만남. 그날 나는 방송 며칠 전 세상을 떠난 로빈 윌리엄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신해철과 함께한 마지막 방송이 하필 다른 이의 추모 특집이었던 것이다.

“<바이센테니얼 맨>이 제가 이 아저씨하고 딱 걸리는 영환데….” <미세스 다웃파이어>와 <죽은 시인의 사회>와 <굿 윌 헌팅>의 로빈 윌리엄스를 추억하는 나에게, 그는 <바이센테니얼 맨>의 로빈 윌리엄스(사진)를 이야기했다. “인간은 결국 죽어야만 인간인 거잖아요. 그래서 자기 신체를 하나하나 인간과 닮게 만들던 로봇이 완전한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결국 죽기를 갈망하는, 뭐 그런 영화인데… 막상 이분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딱 들으니까, 아이… 그….”

그다음 말이 무엇이었을까. ‘아이…’ 하는 탄식 뒤에 ‘그…’로 시작하려 한 어떤 문장. 하지만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마른침과 함께 삼켜버린 그 말. 무엇이었을까? ‘다시 듣기 서비스’로 여러 번 들어보았는데도 결국 난 그 자리에 말줄임표를 넣을 수밖에 없다.

일본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에서 짧게 스쳐간 한 장면. 이제 곧 스파이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면 남편을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주인공 스즈메(우에노 주리)가 창밖으로 펼쳐진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얼마 전 남편과 나눈, 그저 심심하고 평범하기만 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며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이별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떠나고 난 후에 다른 한 사람이 ‘아, 그때 그게 마지막이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별은, 다 그런 건가.”

이별은 다 그런 거다. 작별의 순간은 항상 의외로 빨리 헤엄쳐 우리에게 온다.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 마지막 순간을 이미 흘려보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에겐, 라디오 스튜디오의 마이크에 가려 반만 보이던 얼굴이 그의 마지막이다. “인간은 결국 죽어야만 인간인 거잖아요”라고 말을 시작해놓고선, 마음에 드는 끝 문장을 찾지 못해 잠시 우물쭈물하던 그의 모습이 마지막이다. 신해철의 사망 소식을 듣던 날, 나는 그날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저 이러고만 있었다. “아이… 그…, 그게 참….”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어떤 문장도 성에 차지 않아서 나 역시 수많은 말줄임표를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길 뿐이었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혜성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와 같은 궤도를 도는 항성으로 빛나던 그가 한밤의 별똥별로 갑자기 떨어지기 두 달 전. 정말 운좋게도 내가 그의 곁을 스쳐간 두 번의 만남. 그때 내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은 ‘영리한’ 논객이 아니었다. ‘우직한’ 뮤지션이자 ‘현명한’ 디제이였다. 노래를 들으며 상상했던 것만큼 실제로도 ‘되게 근사한’ 인간이었다.

이번 주말엔 <바이센테니얼 맨>을 다시 보려 한다. 로빈 윌리엄스와 신해철. 두 사람의 영화와 노래가 나와 함께해주어서 그래도 제법 견딜 만했던 지난 시간들을 추억하려 한다. 원래도 슬픈 영화였는데 이번엔 더 슬픈 영화가 될 것 같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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