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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인터스텔라’가 ‘정치 드라마’인 이유 5가지

등록 2014-11-18 14:04수정 2014-11-18 18:01

영화 ‘인터스텔라’는 할리우드에서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을 구축해온 명장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이다. 지구에서 꿈의 세계를 배경으로 펼친 독특하고 무한한 상상력은 이번에 우주로 뻗어간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인터스텔라’는 할리우드에서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을 구축해온 명장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이다. 지구에서 꿈의 세계를 배경으로 펼친 독특하고 무한한 상상력은 이번에 우주로 뻗어간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광활한 우주 가운데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
정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훌륭한 ‘드라마’
*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제가 뭐냐고 묻는다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라고 답하는 게 맞을 거다. 중년의 머피로 나오는 배우 제시카 차스테인이 “인터스텔라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딸에게 보낸 편지”라고 말했으니 달리 토를 달 이유는 없다. 하지만 영화가 다루는 내용은 우주처럼 넓고 블랙홀만큼이나 신비롭다.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영화는 한편의 훌륭한 드라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로서 유용한 장면들이 영화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감독이 의도한 건 결코 아니겠지만….

 

1. 나사(NASA), 좋은 정당의 본보기

멸망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지만 인류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사자에 쫓기는 영양 떼처럼 모래 먼지를 피해 이리저리 몰려다닐 뿐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진실마저 외면해버린다. 머피의 학교 선생님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소련을 파멸로 몰고가기 위한 미국의 사기극이었다”고 가르친다. 그나마 인류를 구원해줄 유일한 길이 우주과학이건만 눈앞의 생존에 급급해 미래를 부정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식량뿐이다.

그래도 나사가 있었다. 나사는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들의 조직이다. 암담한 현실을 바꿔보려는 의지의 결집체다. 무릇 큰 뜻을 품은 사람들이라면 세상의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상황에 맞는 행동이 무엇인지 면밀히 타산할 줄 알아야 하고, 원대한 청사진을 마련해 내놓을 만한 역량이 있어야 한다. 나사는 그랬다. 토성 근처에 ‘웜홀’이 열렸음을 알아챘고 생명이 살 수 있는 행성 12개를 추려낸 뒤 12명의 우주인들을 보내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 뛰는 ‘나사로 프로젝트’를 발진한다. 현대 정치에서 정당이 갖춰야 할 요건들을 나사는 차곡차곡 갖춰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정당이 아니어도 좋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도 필요로 하는 덕목들이다.

미래에 대한 밑그림은 지식인들이 그릴 수 있으나 그를 실행하는 건 ‘일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영화는 초반에 주인공 쿠퍼(매튜 매커너헤이)가 성실한 농부이자 숙련된 기술자임을 보여준다. 노동으로 단련된 그의 근육과 의지는 어떤 위기가 닥쳐도 굴하지 않고 과감하게 뚫고 나간다. 자신을 던지는 헌신성을 보인다. 그에 반해 아멜리아(앤 헤서웨이)가 “이 분야 최고예요”라고 인정했던 지식인 만 박사(맷 데이먼)는 이기심과 허위의 명분에 매달려 인류를 파멸로 몰아간다.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기반이 되는 튼튼한 정당, 미래를 개척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2. 플랜 A와 플랜 B, 최대 강령과 최소 강령

브랜드 박사(마이클 케인)에게는 계획이 두 가지 있었다. 플랜 A는 살기 좋은 새 행성을 찾아 인류 전체를 통째로 옮기는 거대한 구상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력을 마음대로 다룰 줄 알아야 하는데, 그 수수께끼의 해법은 블랙홀 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현실주의자의 눈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도전이다. 그러기에 브랜드 박사의 진짜 목표는 플랜 B다. 냉동 상태의 수정란을 싣고가 새로운 행성에서 인류의 부활을 이뤄내는 것이다. 물론 지구에 있는 종족은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만일 브랜드 박사가 ‘솔직하게’ 플랜 B만을 얘기했다면 아무도 우주로 날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쿠퍼는 어린 딸 머피를 껴안고 함께 죽음을 맞는 길을 택할 게 분명하다. 아니 어쩌면 일부 부류들은 우주로 날려보낼 냉동 실험관에 자신의 정자를 채워넣으려고 목숨을 건 투쟁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우연과 필연이 교직하면서 이뤄진다. 브랜드 박사에게는 플랜 A가 플랜 B를 이뤄내기 위한 미끼였을지 몰라도 플랜 A가 있었기에 인류는 한가닥 광명을 찾아 무시무시한 웜홀로 기꺼이 빨려들어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두 가지 계획 모두를 달성한다.

정치에서 최대 강령과 최소 강령의 관계도 닮은 점이 많다. 최대 강령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점이다. 이념이라고 불러도 좋다. 최소 강령은 당장의 삶을 향상시키려는 실현 가능한 목표들이다. 어느 하나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저 멀리 펄럭이는 깃발이 보여야 흔들리는 현실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현실적 요구를 관철해내려는 노력이 있어야 대중들의 지지를 얻는다.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아마도 북유렵 수준의 복지국가 실현이 최대 강령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 지점을 향해 전진하는 과정에 무상급식, 무상보육 등의 최소 강령이 놓여있다. 최대 강령이 제시되지 않은 채 최소 강령만을 놓고 벌이는 찬반 논쟁은 샛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왜 재벌 회장 손자한테까지 공짜밥을 먹여주느냐’는 해묵은 논란만을 되풀이 할 뿐이다. 제대로 된 정치조직이라면 최대 강령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뜨거운 논쟁을 피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묘사된 우주의 모습.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무한한 상상력은 이번에 우주로 뻗어간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묘사된 우주의 모습.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무한한 상상력은 이번에 우주로 뻗어간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3. 운명의 주인공은 우리 인간이다

영화에서는 누군지 모를 ‘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토성 가까이에 웜홀을 열어주고 지구 곳곳에 중력 이상 현상을 일으키며 인류에게 계속해서 구조 신호를 보낸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초월적 존재이자 절대자다. 그들은 유일신 사상의 ‘신’일 수도 있고 범신론의 ‘섭리’일 수도 있다. 지구인을 긍휼히 여긴,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외계인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블랙홀 장면에 이르면 그들의 정체가 분명해진다. 로봇 타스가 “과거를 바꾸라고 그들이 우리를 여기에 데리고 온 게 아니야”라고 말하자 쿠퍼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아니야. 우리가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거야.”

애초 신도 섭리도 외계인도 없었던 거다. 신의 예정이라거나 결정된 운명이라거나 필연의 법칙이라는 건 없는 거다. 농부 쿠퍼를 나사로 이끈 것도, 중력의 법칙을 알아내 그걸 인류에게 전달해주는 것도 ‘그들’이 아니다.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블랙홀 속으로 뛰어든 ‘인간’ 쿠퍼가 인류를 구한 것이다. 물론 쿠퍼 혼자 힘만으로는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다. 미래에 사는 인류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를 구하기 위해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인류의 후손은 5차원 공간에 존재하기에 3차원에 사는 현생 인류에게는 직접 구원의 손길을 뻗을 수 없다. 어디까지나 조력자다.

운명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사회를 바꾸고 자연을 개조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다. 다른 힘들이 있다면 그건 외부적 조건일 뿐이다. 영화에서 상징적 표현으로 나오는 딜런 토마스의 시도 우리에게 외친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닥쳐오는 운명에 순순히 굴복하지 말고 끝까지 맞서 싸우라고 말한다. 사회를 개혁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리 상황이 좋아지고 객관적인 조건이 무르익는다고 해도 저절로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때에야 비로소 새 세상은 열리는 법이다. 집권 여당의 무능과 횡포가 심하더라도 그래서 민심이 극도로 이반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내고 투표장으로 이끌어 낼 동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그건 그저 여론조사상의 수치일 뿐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4. 모두의 시간은 똑같이 흘러가야 한다

인듀어런스호 탑승자들이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은 밀러 행성이다. 그들은 밀러 행성에서 거대한 파도에 휩쓸릴 뻔한 고초를 겪다가 겨우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저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인데, 지구 시간으로 23년이 지났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이 큰 곳에서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흘러간다. 중력이 크다는 의미는 행성의 질량이 크다는 뜻이다. 행성의 질량이 크면 행성 주위의 공간이 휘어지고 이 곳을 지나는 빛 역시 휘어져서 움직인다. 그 때문에 시간의 속도에 차이가 난다.

영화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정말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평한 것이냐고. 지구라는 행성에 함께 사는 사람일지라도 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른다. 중력의 차이가 아니라 고통의 차이가 시간에 대한 체감을 다르게 만든다. 날아오를 수는 없지만 걷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중력을 느끼는 사람, 희열만 가득찬 건 아니지만 고통에 압살되지 않는 사람에게 하루는 24시간이다. 하지만 고통이란 중력에 짖눌려 몸뚱이 하나 일으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그리 경쾌하게 흐르지 않는다. 세월호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손목시계는 2014년 4월16일 아침 어느 시각에서 고정돼 있다. 다들 “이제 그만 잊을 때도 됐다”고 말해도 그들 집에 걸린 벽시계는 이제 막 새벽밥을 먹고 나서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어디 세월호 부모들뿐이겠는가. 이 땅에서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지구가 밀러 행성이다. 그들은 조금 전 쓰나미를 만나 허우적대고 있는 거다. 그 숨막히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공정하고 정의로운 분배다. 분배의 대상은 물질적 재화가 될 수도 있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될 수도 있다. 자아실현의 기회를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터스텔라>를 통해 시간의 배분도 정치가 해결해야 할 목록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의 시계가 똑같은 속도로 똑딱거리도록 한다는 것의 중요함 말이다. 저녁이 있는 삶을 갖도록 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도 그 범주에 포함된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5. 지구를 떠나는 쿠퍼, 쿠바를 떠나는 게바라

쿠퍼는 블랙홀에서도 살아나와 지구로 귀환한다. 그야말로 지구를 구한 영웅이다. 게다가 그는 지구를 떠날 때의 젊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인류를 구원해 낸 구세주 대접을 요구한다고 한들 예의에 벗어난 건 아니다. 그런데 딸 머피는 아버지에게 떠나라고 말한다. 겨우 그 말을 하려고 2년간 동면까지 해가며 수명을 연장하고 2주에 걸쳐 쿠퍼 스테이션까지 날아왔나 싶다.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당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것이다. 머피는 이 말을 “어떤 부모도 자식이 죽는 모습을 볼 필요가 없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한다. 병실에는 이미 머피의 자손들로 가득차 있다. 누구 하나 쿠퍼의 존재를 의미있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쿠퍼가 이들 앞에서 “내가 너희들을 있게 한 할아버지”라고 외쳐봐야 세대간 단절만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얼마나 많은 혁명가와 독립 투사들이 자신의 조국을 구한 뒤 독재자로 전락하는지를 지켜봤다. 머피는 아버지가 후손들로부터 의무감이 아닌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사랑과 존경을 받기를 원한 것인지도 모른다.

두번째는 새로운 모험에 도전하라는 권고다. 영화 초반 쿠퍼는 시들어가는 옥수수밭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죠. 우리의 본질을 잊은 것만 같아요. 우리는 탐험가이자 개척자였는데….” 현명한 딸은 아버지를 잘 안다. 아버지는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세상을 탐험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사람이라는 걸. 쿠퍼는 모든 걸 훌훌털고 아멜리아가 있는 에드워드 행성으로 떠난다. 마지막 장면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체 게바라에게 바치는 ‘오마주’로 읽힌다. 쿠바 혁명을 완수하고도 돌연 아프리카 콩고로, 남미의 볼리비아로 고난의 길을 걸어들어간 체 게바라다. 현실의 안락과 권력에 안주하지 않고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불꽃처럼 산화해갔다. 쿠퍼에게도 에드워드 행성은 수정란을 가지고 실행해야 할 플랜 B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유머감각이 풍부한 로봇 타스와 함께 하는 여정은 무척 유쾌할 것임을 암시한다.

 

<인터스텔라>를 정치 드라마로 해석한다고 해서, 사랑과 정치를 분리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랑과 정치는 하나다. 사랑이 없는 정치는 냉혹한 권력욕에 지나지 않고, 정치적 결단이 없는 사랑은 간사한 혀놀림일 뿐이다. 영화는 사랑에 기반한 인간의 행동(정치!)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공간의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의 위대함만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라고 행동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영화의 배경인 웜홀을 연상시킨다. 웜홀은 멀리 떨어진 두 공간에 중력을 가해 공간을 휘어지게 만든 다음,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통로를 뜻한다. 사랑과 정치는 낡아빠진 현실에서 찬란한 미래로 나아가는 웜홀이다. 그 한쪽 끝이 사랑이라면 다른 쪽 끝은 정치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만들어 나가는 정치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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