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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잊지 말자 ‘파업전야’, 드러내라 ‘독립본색’…한국 독립영화사 결정적 장면 5

등록 2014-11-30 20:18수정 2014-12-01 13:13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80 대 100.’ 올해 1월부터 현재까지 개봉한 한국 독립영화(다양성 영화)와 상업영화의 편수다. 상업영화 대비 80% 수준에 이를 정도로 올 한해 독립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흥행에 크게 성공한 해외 다양성 영화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최근 폭발적으로 양적 성장을 이룬 것만은 분명하다. ‘독립영화 다작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독립영화가 한자리에 모이는 ‘서울독립영화제’(12월5일까지)도 올해 40돌을 맞았다. ‘2014 서울독립영화제’의 슬로건은 바로 ‘독립본색’.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영화의 본색을 찾자’는 취지다. 양적 성장이 두드러진 지금, 한국 독립영화계에 ‘본질로의 회귀’를 외치는 이 역설적인 현실. 한국 독립영화사의 ‘결정적 다섯 장면’을 통해 파란만장한 한국 독립영화의 어제와 오늘, 그 속에서 꿋꿋한 버팀목 구실을 해온 ‘독립영화의 본색’을 돌아본다.

도움말: 고영재(인디플러그 대표),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 교수), 원승환(민간독립영화전용관 확대를 위한 시민모임 이사), 이현희(인디스페이스 프로그래머), 조영각(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1 독립영화 역량의 첫 결집 ‘파업전야’
안기부 덕에 30만 관객

“사실 이 영화 흥행에 결정적 역할을 한 건 바로 안기부다. 안기부가 이 영화의 홍보 부대였던 셈이다.” <파업전야>를 만든 민중영화 제작단체 ‘장산곶매’ 대표를 지낸 강헌의 말이다. 신군부 핵심들이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포진한 노태우 정부는 이 영화에 그만큼 예민하게 반응했다.

노조 결성을 둘러싼 노동자의 투쟁과 저항을 다룬 <파업전야>는 “80년대 맹아기를 거친 한국 독립영화가 축적한 역량이 처음으로 분출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90년 3월 신촌의 작은 소극장에서 첫 시사회를 연 <파업전야>는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순회 상영을 통해 무려 30만명(추산)의 관객과 만났다. 노태우 정부의 방해에 맞서 이 영화를 상영하려는 노동계와 학생운동권의 노력은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절정은 4월13일 전남대 상영회였다. 정부는 1천여명의 전투경찰과 포클레인·헬기까지 동원한 방해 작전을 펼치며 상영을 막았다.

<파업전야> 탄생은 독립영화의 많은 실험이 바탕이 됐다. 88서울올림픽 때문에 집을 빼앗기고 내쫓긴 사람들의 사연을 다룬 27분짜리 첫 독립 다큐영화 <상계동 올림픽>(1988·김동원 감독), 광주 민주화항쟁을 담은 <오! 꿈의 나라>(1989·장산곶매) 등이 바로 그 바탕이다.

2 사전검열 폐지 계기 ‘닫힌 교문을 열며’
‘가위질’ 남발 시대 끝

계부와 딸의 파격적인 사랑을 담은 영화 <로리타>(1998)는 개봉 당시 5분가량 무단삭제됐고, 한글자막에서 ‘아버지’는 ‘아저씨’로, ‘딸’은 ‘소녀’로 엉뚱하게 바뀌었다. 영화법에 의한 ‘사전검열제도’ 탓이었다. 1996년 9월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인 <크래쉬>는 10분 정도 무단삭제돼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한국 영화사에 무수한 ‘가위질’을 남발해온 사전검열제도 폐지를 이끈 것 역시 독립영화였다. 전교조 해직 교사 문제를 다룬 <닫힌 교문을 열며>(1992)를 사전 심의 없이 상영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장산곶매 강헌 대표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소송을 낸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4년 만인 1996년 10월4일 ‘사전심의제 위헌결정’을 내렸다. 영화법은 개정됐고, 검열제도는 등급제로 바뀌었다. 박정희 시대부터 검열을 담당했던 공연윤리심의위원회가 사라지고 영상물등급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후 이지상 감독의 <둘 하나 섹스>가 또다시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9년 ‘음모노출 및 성적 표현과다’로 등급보류 결정을 받자 소송을 제기했고, 2001년 8월30일 ‘등급보류 위헌판결’을 받아냈다. 이후 등급보류는 ‘제한상영가’ 등급으로 대체됐다. 하지만 제한상영가 판정을 두고 여전히 검열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3 인디스페이스 개관과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영화의 오아시스

한국 독립영화는 2007년 비로소 스크린과 유통망을 확보하게 됐다.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만든 영화계의 독립운동기지”(이현희 프로그래머)인 국내 첫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개관한 것. 상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관객들과 만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독립영화들에 인디스페이스는 일종의 ‘오아시스’였다. 한 해 150~300편까지 독립영화가 상영됐다. 인디스페이스 좌석 뒤편에는 안성기·송광호·하지원 등 배우는 물론 임권택·양익준 등 감독들, 그리고 수많은 ‘무명씨’ 등 힘을 보탠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인디스페이스 개관이 독립영화만의 축제가 아닌 영화계 전체의 축제였던 셈이다. 이런 움직임에 힘입어 대형 멀티플렉스 씨지브이 역시 예술영화상영관 이름을 ‘무비꼴라쥬’로 바꾸고 365일 독립영화 상영 체제를 구축했다.

이보다 앞서 ‘서울독립영화제’가 본격 운영에 들어간 것도 독립영화사의 한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1994년 서울단편영화제 시절(2002년 서울독립영화제로 이름을 바꿈)부터 이 영화제를 통해 곽경택·임순례 등 수많은 감독들이 가능성을 인정받으며 충무로에 입성했다. 이후 ‘인디포럼’(1996) 등 다른 독립영화 행사도 탄생했고, 많은 영화제에 독립영화 섹션이 만들어졌다.

4 황금기 연 ‘워낭소리’ ‘똥파리’
관객과 거리를 좁히다

2000년대 후반 독립영화는 비로소 황금기를 맞는다. 독립영화계의 스타에서 이젠 한국 영화계의 스타가 된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가 독립영화의 밀레니엄을 열었다. 총제작비가 6500만원에 불과한 이 영화는 극장 배급망을 통해 전국적으로 10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았다. 이 작은 영화의 성공은 독립영화계에 큰 희망을 안겼다.

독립영화의 상승세는 전용관 탄생과 맞물리면서 2009년 <똥파리>(양익준 감독)를 거쳐 <워낭소리>(이충렬 감독)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는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라스팔마스 국제영화제 등 해외영화제에서 16관왕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했다. 12만3000여명을 동원해 ‘마의 10만 고지’도 넘어섰다. <워낭소리>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워낭소리>는 무려 3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한국영화 흥행 순위 8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영화계는 <워낭소리>를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는 독립영화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대중에게 낯선 용어였던 ‘독립영화’는 <워낭소리>를 통해 비로소 그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5 미래 밝힌 ‘지슬’ ‘한공주’
참신한 만듦새까지

2010년대에 들어서며 독립영화의 스펙트럼은 크게 확장됐다. 사회적·역사적 메시지를 놓지 않으면서도 참신한 만듦새로 관객을 불러모은 작품이 등장하며 젊은 감독들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용산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김일란 감독·7만3000여명), 제주 4·3항쟁을 다룬 <지슬>(오멸 감독·14만3000여명), 성폭력 피해자 학생의 이야기 <한공주>(이수진 감독·22만4000명) 등 흥행과 작품성을 두루 인정받은 작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몇몇 작품을 빼고는 해외 다양성 영화에 밀려 아직도 관객들에게 외면받고 있다. <천안함 프로젝트>, <다이빙벨> 논란 등에서 볼 수 있듯 여전히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민간 전용관과 배급망 확대 등 독립영화 탄생 초기부터 제기돼온 과제들도 여전하다.

서울독립영화제의 첫 모토(2002년)는 ‘충돌’이었다. “낡은 것을 밀어내 새로움을 탄생시키고 영화적 새로움과 사회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충돌”은 일부분에서 소중한 결실을 맺었다. 이제 다시 ‘독립본색’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한 독립영화는 과연 어떤 미래를 열 것인가.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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