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영화 <족구왕> 중에서
몇 달 전 영화 족구왕의 대사를 이 칼럼에서 인용한 적이 있다. 주연도 아니고 조연의 대사 “공무원 시험 준비해.” 그 글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나는 2014년 최고의 영화로 <족구왕>을 꼽겠구나.
2014년이 며칠 남지 않은 지금, 지난회 2014년 최고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이어 2014년 최고의 영화로 <족구왕>을 선정한다. 그리고 오늘 꺼내온 대사는 주인공 만섭의 대사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오늘날의 20대는 야망을 품기 어렵다. 20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다들 원대한 꿈을 품고 살았다. 현실은 녹록치 않더라도, 머리로는 언젠가는 부자가 될 거라고, 언젠가는 유명해질 거라고, 언젠가는 훌륭한 일을 할 거라고, 언젠가는 멋진 삶을 살 거라고 믿으며 살았다.
요즘은 어떤가?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20대를 찾기 어렵다. 지금의 20대는 생존 그 자체를 걱정할 뿐이다. 노력하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구호도,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도 이 시대에는 허황되다.
이런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있다. 20년쯤 전 허영만 작가의 만화 <아스팔트 사나이>가 엄청난 인기를 모으며 연재되었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대박’이 났다. 그런데 바로 올해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허영만 작가의 문하생이었던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이 엄청난 인기를 모으며 연재되었고 드라마로 만들어져 대박이 난 것이다.
만화와 드라마에는 그 시대의 현실이 담겨있다. 90년대와 지금은 꼭 <아스팔트 사나이>와 <미생>만큼의 간극이 있다. <아스팔트 사나이>는 어떤 내용인가. 보잘 것 없는 한 젊은이가 자동차에 대한 꿈을 바탕으로 마침내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일궈낸다는 내용. 그럼 <미생>은 어떤 내용인가? 보잘 것 없는 한 젊은이가 계약직으로 회사에 들어가 정규직 전환을 위해 열심히 회사를 다닌다는 내용. 세계정복과 정규직 전환. 이 어마어마한 간극이 20년간 우리 사회가 만들어온 현실이다.
영화 <족구왕>은 이런 현실에서 젊은이들에게 허황되지 않은 솔직한 구호를 전하는 용기 있는 영화다. 주인공 만섭의 말에 정답이 있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살면 안 된다. 행복이란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누릴 때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누리는 순간에 이뤄지니까.
행복 뿐 아니라 성공이라는, 이 시대에는 너무 거창해 보일 수 있는 목표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일을 쫓다간 지치고 지겨워질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돌아보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을 거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쫓으면, 그게 비록 남들에겐 외면 받는 일일 지라도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우리는 타인과 비교하는 삶을 살 위험이 많아졌다. 흔히 잘나간다는 사람들이 어느 동네에 살고, 어떤 차를 타고, 어떤 직업을 갖고 있고, 어디서 생일 파티를 하는지 다 알 수 있는 사회다. 만수르부터 같은 반 친구까지,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나보다 잘난 사람들의 삶을 공개적으로 엿볼 수 있게 된 셈이다. 불행의 시작이다.
남들보다 더 잘 살기 어렵다면, 남들만큼 살기도 어렵다면, 그러려고 안달하지 말자. 만섭이처럼 좋아하는 족구를 하자. 나의 삶을 살자. 대신 치열하게.
2014년 한 해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