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자, 한 명씩 나와서 각자 학교 오는 길을 표시해봐.” 서울시 지도가 붙은 칠판 앞에 서서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저마다의 등굣길을 지도 위에 빨간 펜으로 그어보라 하셨다. 그녀 차례가 되었다. 수줍게 펜을 움직여 선 하나를 긋고 내려갔다. 이제 그가 칠판 앞에 선다. 빨간 펜을 건네받는다. 정릉에서 연희동까지. 하나의 선 위에 포개지는 또 하나의 선. 그녀의 등굣길과 정확히 일치하는 그의 등굣길.
영화 <건축학개론>의 거의 모든 장면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장면을 특히 좋아한다. 그때 승민(이제훈)이 지어 보인 표정 때문이다. 그게 무슨 대단한 인연이라도 되는 양 괜히 우쭐해진 얼굴. 같은 버스 타고 다니는 걸 알았을 뿐인데 그녀에 대해 아주 많은 걸 알게 된 것만 같아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바로 그 표정.
극장에선 나도 가끔 승민이가 된다. 영화의 어떤 순간이 내 삶의 어떤 순간 위로 포개질 때. 내 인생이 지나온 정류장을 지금 이 영화도 지나고 있구나, 하고 느껴질 때.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방금 본 영화하고 무슨 대단한 인연으로 엮인 양 괜히 우쭐해진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정으로 극장을 나선다. 최근에도 운 좋게 그런 날이 있었다. 영화 <와일드>(사진)를 볼 때였다.
스물여섯살 여성 셰릴 스트레이드가 미국 서부를 종단한 실제 이야기. 사막과 눈길을 오가며 94일 동안 쉼없이 걷는 동안 발톱 여섯개가 빠져버린 고난의 행군. 1995년 여름의 그 길고 거친 여정이 17년 뒤 550쪽짜리 책이 되었고 다시 2년 뒤 115분짜리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멋진 영화에서 가장 먼저 나를 사로잡은 장면은 여행 첫날 거대한 배낭을 메고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배낭에 매달려 바둥거리는 그녀의 아침 위로 10년 전 내가 맞이한 그날 아침이 포개졌다. 호기롭게 사표 던지고 중남미 여행 6개월 여정을 시작하는 첫날.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않는 커다란 배낭에 매달려 나 역시 한참을 바둥댔더랬다. 그때의 우스꽝스럽던 내 모습과 제법 비슷한 포즈로 안간힘 쓰는 주인공을 보는 순간, 벌써 셰릴의 여행에 대해 아주 많은 걸 알게 된 것만 같아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나는 배낭에서 덜어내야 할 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그렇지만 하나하나가 모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비상시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덜어낼 수가 없었다. 그 배낭 그대로 어떻게 해서든 짊어지고 가야 했다.”
책 <와일드>에서 발견한 셰릴의 변명은 곧 나의 변명. 초보 여행자들의 흔한 실수, 혹은 집착.
1995년의 셰릴과 2005년의 내가 짊어진 건 단지 배낭이 아니었으니. 그건 차라리 불안감이었고 조바심이었다. 인생의 쉼표를 찍으러 떠나면서 지레 수많은 물음표만 걸머지고 비틀대는 꼴이었다.
다행히 10년 전 그 긴 여행에서 나는, 짐을 줄이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여행에서 나는, 내 배낭을 ‘어떻게 해서든 짊어지고’ 가는 법도 배웠다. 여행이란 결국 자기 배낭의 무게에 익숙해지는 과정. 감당해야만 하는 짐은 또 꿋꿋하게 감당하며 걷는 것이 삶이니. 인생이 얼마나 가벼워지느냐도 중요하지만 내가 얼마나 튼튼해지느냐도 중요하다는 걸 그때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나처럼 셰릴도 그런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내가 걸은 길보다 훨씬 더 외롭고 험한 길을, 그 누구보다 씩씩하고 아름답게 걷는 여자였다.
영화 <인 디 에어>에서 강연에 나선 라이언 빙엄(조지 클루니)은 언제나 배낭 하나를 들고 연단에 오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배낭을 멨다고 상상하세요. 자, 이제 가진 걸 모두 넣으세요. 옷, 전자기기, 램프, 시트, 티브이…. 배낭은 점점 무거워지죠. 소파, 침대, 식탁, 차와 집도 넣어요. 배낭에 다 넣으세요. 걸어보세요. 힘들죠? 이런 게 일상입니다. 못 움직일 정도로 짐을 넣고 걸어가는 게 바로 우리의 삶이죠. 당신은 그 배낭에서 무엇을 뺄 겁니까?”
자기 인생이 무거워 한번이라도 바둥거려본 사람은 누구나 셰릴이다. 그 인생 그대로 ‘어떻게 해서든 짊어지고’ 걸어온 우리 모두는 이미 셰릴이다. 이제 무엇을 뺄 것인가. 대신 무엇을 채울 것인가. 이제 막 자신의 인생과 다시 사랑에 빠진 셰릴의 마지막 표정이 영화 <와일드>가 내놓은 답이다. 당장 짐을 꾸리고 싶게 만드는. 기어이 코끝이 찡해지고야 마는. 그녀의 그 희미한 미소가.
김세윤 방송작가
영화 <와일드>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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