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니>
배우 김정은의 목소리가 한참이나 깊어진다. 빗방울 튀는 듯한 음성은 서근서근해지고, 더 간절해진다. ‘첫사랑’ 아닌 ‘첫사랑’을 맞닥뜨린 탓이다. 가을산 밑절미부터 찬찬히 단풍들듯 다가간다. 서른 살 조인영으로 분해 만난 열세 살 적은 고등학생 이석에게.
열일곱 소년에 비친
‘옛사랑의 그림자’
현재의 사랑일까
추억의 되새김질일까 <해피엔드>의 정지우 감독이 6년 만에 내놓은 <사랑니>를 여는 말은 ‘첫사랑’이지만, 첫사랑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기억도 불분명한 사랑의 어제,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사랑의 내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늘 만난 사랑을 한 컷으로 줌인한다. 학원 수학강사 인영(김정은). 솔직하고 쿨한 도시 여성이다. 오랜 친구 정우(김영재)와 동거 중이다. 어느날 학원에 수업을 받으러온 이석(이태성)에게 통째 마음을 빼앗긴다. 이유가 없다. 13년 전 첫사랑을 닮았다. 이름까지 같다. 인영은 깊은 눈으로 친구에게 말한다. “사람을 때리는 게 나쁜 짓이지, 불륜이고. 누구랑 키스하고 싶은 게 나쁜 일이야?” 이석은 “사람이 너무 쉽게 죽는다”며 의사가 되고 싶어할 만큼 순수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등학교 1년생이다. 인영이 좋다. 그렇다고 자깝스러운 척하지 않는다. 인영보다 먼저 ‘대쉬’하고, 먼저 질투하고, 먼저 감싸 안는다. 망설임이 없다. 첫사랑인 것이다. 이유도, 망설임도 없어 더는 이야기할 것도 없을 듯한 이들 첫사랑의 단조로움을 감독은 혼재하는 ‘기호’로 극복해간다. 또 다른 인영(정유미)의 구실이 특히 그렇다. 석의 죽은 일란성 쌍둥이형 이수를 좋아했다가 새로 만난 석을 이수처럼 사랑하는 17살 여고생이다. 석은 그랬다. “네가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라, 우리 형이잖아.” 두 인영의 사랑을 일컫자면 죄다 ‘시뮬라시옹 사랑’, 복제된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동의하지 않을 터다. “나, 다시 태어나면, 그 애(석)로 태어나고 싶어”라고 어린 인영은 말하지만, 서른 살 인영은 그것이 사랑의 내일이 아니란 걸 안다. 진짜 첫사랑이었던 서른 살의 이석을 13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 “안 닮았네, 진짜”라고 말하거나, 심지어 두 이석을 함께 만난 순간은 징후적이다. <사랑니>는 길고 더디다. 고작 3~4일 동안 벌어진 사랑의 현재 풍경을 보는 듯하다. 마지막 헹굼물처럼 말간 빛으로 포장한 영화 전체의 색조는 어두운 객석에 묻혀 있는 관객에게 꽤나 멀어보이지만, 불륜의 혐의를 산뜻하게 잊게 한다. 두 명의 이석, 두 인영, 두 정우(17살 정우도 등장한다)가 교차하며 현실과 과거, 인식과 기억의 경계는 스푸마토처럼 흐릿하다. 영화는 중반까지 어린 인영이 서른 살 인영의 13년 전 모습인 듯 어지럽다. 실재인지 인영의 착시인지 명확하지 않다. 사랑은 새로운 것인가, 복제되어 되풀이되는가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냥, 석이 어린 인영에게 달려갔을 때 에인 듯 경적을 누르며 헛헛한 가슴으로 눈물을 훔치는 서른 살 인영이 존재할 뿐이다. 관객은 호응은 가늠하기 어렵다. <사랑니>는 현실적이지도, 신비롭지도 않다. 혼란과 아찔함도 모두 사랑이 주는 기쁨이라는 정 감독의 행복론이 숨어있다. 혼란스럽고 아찔한 사랑이 가져다준 불행을 이야기했던 전작 <해피엔드>와 비교된다. 29일 개봉.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영화인 제공.
‘옛사랑의 그림자’
현재의 사랑일까
추억의 되새김질일까 <해피엔드>의 정지우 감독이 6년 만에 내놓은 <사랑니>를 여는 말은 ‘첫사랑’이지만, 첫사랑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기억도 불분명한 사랑의 어제,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사랑의 내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늘 만난 사랑을 한 컷으로 줌인한다. 학원 수학강사 인영(김정은). 솔직하고 쿨한 도시 여성이다. 오랜 친구 정우(김영재)와 동거 중이다. 어느날 학원에 수업을 받으러온 이석(이태성)에게 통째 마음을 빼앗긴다. 이유가 없다. 13년 전 첫사랑을 닮았다. 이름까지 같다. 인영은 깊은 눈으로 친구에게 말한다. “사람을 때리는 게 나쁜 짓이지, 불륜이고. 누구랑 키스하고 싶은 게 나쁜 일이야?” 이석은 “사람이 너무 쉽게 죽는다”며 의사가 되고 싶어할 만큼 순수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등학교 1년생이다. 인영이 좋다. 그렇다고 자깝스러운 척하지 않는다. 인영보다 먼저 ‘대쉬’하고, 먼저 질투하고, 먼저 감싸 안는다. 망설임이 없다. 첫사랑인 것이다. 이유도, 망설임도 없어 더는 이야기할 것도 없을 듯한 이들 첫사랑의 단조로움을 감독은 혼재하는 ‘기호’로 극복해간다. 또 다른 인영(정유미)의 구실이 특히 그렇다. 석의 죽은 일란성 쌍둥이형 이수를 좋아했다가 새로 만난 석을 이수처럼 사랑하는 17살 여고생이다. 석은 그랬다. “네가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라, 우리 형이잖아.” 두 인영의 사랑을 일컫자면 죄다 ‘시뮬라시옹 사랑’, 복제된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동의하지 않을 터다. “나, 다시 태어나면, 그 애(석)로 태어나고 싶어”라고 어린 인영은 말하지만, 서른 살 인영은 그것이 사랑의 내일이 아니란 걸 안다. 진짜 첫사랑이었던 서른 살의 이석을 13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 “안 닮았네, 진짜”라고 말하거나, 심지어 두 이석을 함께 만난 순간은 징후적이다. <사랑니>는 길고 더디다. 고작 3~4일 동안 벌어진 사랑의 현재 풍경을 보는 듯하다. 마지막 헹굼물처럼 말간 빛으로 포장한 영화 전체의 색조는 어두운 객석에 묻혀 있는 관객에게 꽤나 멀어보이지만, 불륜의 혐의를 산뜻하게 잊게 한다. 두 명의 이석, 두 인영, 두 정우(17살 정우도 등장한다)가 교차하며 현실과 과거, 인식과 기억의 경계는 스푸마토처럼 흐릿하다. 영화는 중반까지 어린 인영이 서른 살 인영의 13년 전 모습인 듯 어지럽다. 실재인지 인영의 착시인지 명확하지 않다. 사랑은 새로운 것인가, 복제되어 되풀이되는가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냥, 석이 어린 인영에게 달려갔을 때 에인 듯 경적을 누르며 헛헛한 가슴으로 눈물을 훔치는 서른 살 인영이 존재할 뿐이다. 관객은 호응은 가늠하기 어렵다. <사랑니>는 현실적이지도, 신비롭지도 않다. 혼란과 아찔함도 모두 사랑이 주는 기쁨이라는 정 감독의 행복론이 숨어있다. 혼란스럽고 아찔한 사랑이 가져다준 불행을 이야기했던 전작 <해피엔드>와 비교된다. 29일 개봉.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영화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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