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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남을 밀어내다 자신을 가둬버린 자

등록 2015-02-06 20:15수정 2015-10-23 18:40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이 글에는 영화 <레몬트리>의 마지막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7년 전 작품이라 용납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아직 안 보신 분을 위해 미리 알려드립니다.

새로 이사 간 집은 창밖 풍경이 참 좋다. 옆집이 레몬농장인 덕분이다. 거실 창을 열면 담장 너머로 키 작은 레몬나무들이 보이는데, 초록빛 이파리 사이사이마다 샛노란 레몬들이 알알이 익어가는 것이다. 보고만 있어도 하루가 상큼해지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남편 눈에는 레몬나무가 거슬린다. 남편과 함께 일하는 직원들 눈에도 레몬농장이 영 마뜩잖다. 팔레스타인 사람이 가꾸는 농장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행여 잎이 무성한 레몬나무에 몸을 숨기고 총이라도 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요르단강 서안. 남편은 이스라엘 국방장관. 그러니 한가하게 창밖 풍경 보며 감탄만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라고, 남편과 남편의 경호원들이 말한다.

영화 <레몬트리>(2008)의 이야기는 팔레스타인 여인 살마(히암 압바스)의 레몬농장 바로 옆집에 이스라엘 국방장관 부부가 이사 오면서 시작된다. 오자마자 마당에 감시탑을 세우고 철조망을 두른 뒤 가시철사로 칭칭 감은 경호팀이, 기어코 살마의 레몬나무까지 싹 다 베어내려 한다. 테러리스트의 엄폐물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란다. 허락도 구하지 않는다. 그냥 통보할 뿐이다.

일찍 남편 잃고 줄곧 홀로 지켜온 농장. 레몬나무는 곧 살마의 모든 것. 이대로 굴복할 순 없다. 그래서 감히(!) 이스라엘 국방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건다. 의도치 않게 화제의 중심에 선다. 바위를 치는 계란들이 으레 감당해야 할 시련이 차례로 닥친다. 그럴수록 국방장관의 아내 미라(로나 리파즈미하엘)의 마음이 편치 않다. 이웃집 여인의 평온한 삶을 망쳐버린 죄책감, 그런 죄책감 따위 느끼지도 않는 남편에 대한 실망감. 영화는 살마의 ‘변함없는 의지’를 계속 지켜보면서 동시에 미라의 ‘변해가는 심경’까지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초록빛 풍성한 이야기 사이사이마다 샛노란 감응과 소통의 순간들이 알알이 익어가는 것이다.

특히 쉬이 잊히지 않는 마지막 장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명장면. 결국 집을 통째로 에워싸는 보안장벽을 쌓아 아예 요새로 만들어버린 국방장관이 아침을 맞이한다. 천천히 블라인드가 걷히고 창밖 풍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더이상 노란 레몬은 보이지 않는다. 초록빛 이파리도 사라졌다. 레몬나무 살랑대던 자리마다 삭막한 콘크리트 담벼락이 버티고 서 있다.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고도 그 숨막히는 풍경 앞에서 그만 할 말을 잃은 국방장관. 남을 밀어내려다 도리어 자신을 가두어버린 어리석은 인간.

<레몬트리>의 국방장관 집은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미니어처다. 그가 집의 울타리를 따라 세운 장벽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이스라엘의 경계선을 따라 건설 중인 장벽의 은유다. 이스라엘이 ‘보안장벽’이라 부르고 팔레스타인은 ‘분리장벽’이라 부르는 콘크리트 담장. 2002년부터 세워지기 시작했고 2020년 완공을 목표로 지금도 공사 중이다. 당장 철거하라고 국제사회가 목소리를 높여도 이스라엘은 요지부동. 기어이 벽을 다 세우겠다는 것이다. 기어코 레몬나무를 다 베어버리겠다는 영화 속 국방장관처럼.

<오마르>
<오마르>
이번주 개봉작 <오마르>(2013·사진)를 보았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려고 매일 8미터 높이 분리장벽을 넘는 팔레스타인 청년이 주인공이다. 함께 나고 자란 동네 한복판을 가르며 별안간 장벽이 세워진 탓에 소꿉친구를 만나러 가는데도 그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벽이 갈라놓은 사랑. 벽에 가로막힌 우정. 이윽고 거짓과 진실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채 마지막까지 관객을 쥐고 흔드는 빼어난 스릴러.

<오마르>를 보면서 계속 <레몬트리>를 생각했다. 오마르를 막아선 벽과 다르지 않은 살마의 벽을 떠올렸다. 그 벽을 쌓아올린 이스라엘 국방장관의 마지막 표정도 기억해냈다. 자신을 지키려고 세운 ‘보안장벽’이 오히려 자신을 고립시키는 ‘분리장벽’이 된 걸 깨닫고 몹시 난처해하던 그 표정.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어리석은 인간의 표정.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세상은 결국 ‘벽을 높이는 사람’과 ‘울타리를 넓히는 사람’의 싸움이라고 나는 믿는다. 두 편의 근사한 이스라엘 영화가 내 믿음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레몬트리>와 <오마르>를 보면 좋겠다. 이렇게 괜찮은 영화들을 혼자만 알고 있기가 미안해서 드리는 말씀이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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