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채피>의 한 장면.
닐 블롬캠프 신작 영화 ‘채피’
살아남으려는 로봇 고군분투기
살아남으려는 로봇 고군분투기
2009년 개봉한 영화 <디스트릭트 9>은 단숨에 에스에프(SF) 걸작 반열에 올랐다. 신예 닐 블롬캠프 감독은 자신의 고향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를 배경으로 한 첫 장편 연출작에서 인간의 통제를 받는 외계인 수용구역 얘기를 통해 인종차별 문제와 인간의 잔혹성을 비판했다. 맷 데이먼 주연의 두번째 영화 <엘리시움>(2013)에서는 버려진 지구와 최상위 1%만을 위한 세상을 풍자적으로 그렸다. 전작만큼 완성도가 뛰어나진 않았지만, 문제의식에 있어선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12일 개봉하는 <채피>는 닐 블롬캠프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역시 자신의 고향 요하네스버그를 배경으로 한 에스에프 영화다. <엘리시움>으로 다소 주춤했던 그가 <디스트릭트 9>의 명성을 되살릴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개를 가로젓는 이들이 더 많다. 불꽃 튀는 액션과 볼거리 가득한 영상은 만족할 만하지만, 에스에프의 고갱이라 할 과학적 상상력이 빈약하고 주제의식도 얕기 때문이다.
가까운 미래인 2016년, 매일 300건의 범죄가 폭주하는 요하네스버그에 세계 최초의 로봇 경찰 ‘스카우트’ 군단이 투입된다. 로봇 경찰의 진압 능력에 힘입어 범죄가 급격히 줄어든다. 스카우트 개발자인 디온(데브 파텔)은 어느날 그토록 바라던 인공지능 개발에 성공한다. 로봇에 인공지능을 적용하고 싶어하지만, 그가 몸담은 로봇 개발 회사 대표 미셸(시고니 위버)은 불허한다.
디온은 임무를 수행하다 망가져 폐기된 스카우트 22호를 몰래 빼돌려 인공지능 탑재 실험을 하려 한다. 그러던 중 갱단에 납치되고,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 ‘채피’를 탄생시키게 된다. 갱단은 채피를 갱스터 로봇으로 만들어 범죄에 이용하려 들지만, 디온은 채피에게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채피는 갓 태어난 아기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양육자의 돌봄을 통해 지식과 감성을 습득해나간다는 설정인데, 이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 로봇의 성장 과정을 인간과 동일시한 설정이 과학적 결과물인 인공지능을 너무 단순하게 해석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로봇은 인간이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믿음에 따라 채피를 파괴하려는 무기 개발자 빈센트(휴 잭맨)를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도식적인 악역으로만 묘사한 것도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뻔하고 늘어지던 스토리는 막판에 가서 전복을 꾀한다. <디스트릭트 9>에서 보여준 ‘역지사지’의 변주 같기도 하다. 꽤나 흥미로운 결말이다. 하지만 진중권 교수가 <디 워>(심형래 감독) 결말을 비판하며 든 ‘데우스 엑스 마키나’(고대 그리스극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해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이를 결말로 이끌어가는 수법)까진 아니어도 너무 쉽게 문제를 해결해버린 듯한 느낌도 든다.
<채피>는 지난주 개봉한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1330만달러로 흥행 1위에 올랐다. 하지만 <디스트릭트 9>(3735만달러)과 <엘리시움>(2980만달러)의 첫 주 흥행성적에는 크게 못 미친다. 북미 유명 영화 비평 사이트 ‘로튼 토마토’의 신선도지수(평점)는 30% 수준이다. 전작 <디스트릭트 9>과 <엘리시움>의 신선도지수는 각각 90%와 68%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사진 유피아이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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