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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붉은색으로만 도배된 ‘간신’

등록 2015-05-12 19:43

영화 <간신>의 한 장면. 왼쪽은 연산군 역을 맡은 김강우, 오른쪽은 장녹수 역을 맡은 차지연.
영화 <간신>의 한 장면. 왼쪽은 연산군 역을 맡은 김강우, 오른쪽은 장녹수 역을 맡은 차지연.
연산군 1만 미녀 선발 ‘채홍’ 배경
‘왕 위의 왕’ 되기 위해 암투 벌여
노출·잔인함 과도한 연출력 아쉬워
중국 송나라의 역사서 <송사>의 ‘유일지전’에 “천하의 다스림은 군자가 여럿이 모여도 모자라지만, 천하를 망치는 것은 소인 하나면 족하다”는 말이 있다. 세치 혀로 권력자의 눈과 귀를 가려 천하를 망치는 소인, 즉 ‘간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 권력욕에 사로잡혀 자식마저 삶아 바쳤다는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역아’, 평민 신분이었지만 네로 황제를 등에 업고 온갖 사치는 물론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로마의 ‘티겔리누스’,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남편을 살해한 뒤 메리와 재혼해 국정을 농단했던 스코틀랜드의 ‘보스웰 백작’ 등은 오늘날까지 ‘간신’의 대명사로 불린다.

오는 21일 개봉하는 영화 <간신>은 연산군 시대 간신 ‘임사홍·임숭재 부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은 우리 역사 속 희대의 간신으로 그려진다.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비극적 죽음으로 인해 광기에 사로잡힌 연산(김강우)은 무오사화(연산군 4년·1498년)와 갑자사화(연산군 10년·1504년)를 연달아 일으키며 폭정을 일삼는다. 연산군 11년, 여색을 밝히는 연산을 현혹하기 위해 임사홍(천호진)·임숭재(주지훈) 부자는 전국의 미녀 1만명을 뽑아 바치기로 한다. ‘여자를 채집하는 관리’인 ‘채홍사’로 임명된 부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기생인 ‘운평’을 선발하게 되고, 그동안 어미 잃은 연산의 상처를 교묘히 이용해 총애를 받았던 ‘장녹수’(차지연)는 권력을 뺏길까 전전긍긍한다. 임숭재에 의해 선발된 백정의 딸 단희(임지연), 장녹수와 결탁한 기녀 설중매(이유영)는 조선 최고의 색(色)이 되기 위해 방중술(잠자리 기술)을 연마하고, 연산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대리전을 치르게 된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등에도 기록된 ‘채홍’이라는 파격적인 사건을 스크린에 불러낸 만큼 영화의 노출 수위는 상당히 ‘센 편’이다. 수백가지의 방중술을 익히는 수련 과정, 갈고닦은 실력으로 대결을 펼치는 단희와 설중매의 경연 장면 등은 그간의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적나라하고 자극적인 대사와 표현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영화는 ‘야하다’기보다는 ‘잔인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시체를 부관참시하고 활과 칼, 도리깨를 휘두르며 피의 난장을 벌이는 ‘폭압적인 사디스트’ 연산의 모습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김강우는 과거 연산을 연기했던 신영균·이대근·유인촌·정진영 못지않은 광기 어린 연기력을 뽐낸다.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주지훈과 첫 영화 데뷔를 한 뮤지컬 배우 차지연도 안정적이다. <인간중독>, <봄>으로 각각 데뷔한 임지연과 이유영이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노출 수위가 높은 작품을 선택한 것은 못내 아쉽지만 연기는 특별히 흠잡을 곳이 없다. 중간중간 ‘판소리 내레이션’을 통해 배경을 설명하는 독특한 형식을 취한 점도 참신하다. 무엇보다 작은 소품·의상부터 쾌락이 넘실대는 기방과 궁궐의 내밀한 풍경까지 완벽하게 담아낸 화려하고 정교한 미장센은 큰 볼거리다.

문제는 감독의 연출력. <내 아내의 모든 것>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등에서 감각적인 연출을 선보였던 민규동 감독의 장기가 이번 작품에선 전혀 발휘되지 않는다. 영화는 중반 이후부터 야하거나 잔인한 장면이 불필요하게 반복되면서 느슨하고 지루해진다. 권력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던 임숭재가 ‘어릴 시절 연정’ 때문에 표변하는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영화 전체의 축을 흔드는 약점이다. “왕 위의 왕이 되기 위해” 달려가는 인간의 욕망과 파국에만 초점을 맞췄으면 차라리 깔끔했을 법하다. 2시간10분의 긴 러닝타임이 지나고 나면 결국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데?”라는 의문만 맴돈다. 마치 엠에스지(화학조미료)를 듬뿍 넣은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난 뒤 주재료가 뭐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처럼.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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