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베테랑>, <협녀: 칼의 기억>의 공통점은? 올 여름 스크린을 장악한 ‘텐트폴 영화’의 교집합은 ‘의상감독 조상경’이다. 시대배경도, 분위기도 다른 세 영화의 의상을 모두 제작한 조 감독은 지난 2002년 <피도 눈물도 없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올드보이> <괴물> <타짜> <신세계> 등 굵직한 영화의 의상을 담당했다. 지난해에는 <군도: 민란의 시대>로 대종상영화제 의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캐릭터의 완성은 의상이며, 의상을 보면 영화가 보인다”는 조상경 의상감독. 그가 전하는 세 영화 속 ‘의상 이야기’를 들어본다.
제작의상 총 4500벌
사진·논문 뒤져 철저 고증
1933년 당시 군복 그대로
<암살> 안옥윤의 ‘웨딩드레스’, 가터벨트 등 액션신에 최적화
33년 당시 군복 샘플을 구해 똑같이 제작한 군복.
■ 무려 4500벌 제작…가장 고심한 옷은 ‘웨딩드레스’
<암살>은 일제강점기 배경 시대극이다 보니 ‘철저한 고증’이 기본. 역사적 기록과 사진, 논문까지 꼼꼼히 뒤져 시대를 그려냈다. 제작된 의상은 무려 4500벌. 당시 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하기 위해 레트로 컬러와 빈티지 풍의 옷감을 사용했다. 또 중국옷은 중국에서, 한국 옷은 한국에서 만들어 배우들에게 현지 분위기와 느낌을 익히도록 했다. 조상경 감독은 “군복은 33년 당시 군복 샘플을 구해 똑같이 제작을 했다. 지퍼를 달면 배우들이 편하게 입고 벗을 수 있는 옷도 당시 상황을 고려해 모두 단추를 달 정도로 고증에 신경을 썼다”고 설명했다.
고증과 달라진 부분도 있다. 반민특위 법정의 ‘법복’이 대표적이다. 1949년 대한민국에는 법복이 없었다. “법복이 처음 등장한 공식기록은 1953년이지만, 영화적 문법으로는 ‘법정’ 느낌을 살리기 위해 법복을 만드는 게 맞는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반면 정확한 고증이 논란을 부른 경우도 있다. 영화 속 김구 선생은 한복이 아닌 중국 전통 의상 ‘창산’차림이다. 관객들은 의문을 제기했지만, 실제 30년대 독립 운동가들은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창산’이나 ‘치파오’ (중국 전통 여성의상)등 중국 옷을 주로 입었다. 조 감독이 가장 고심한 의상은 안옥윤(전지현)의 ‘웨딩드레스’다. 30년대는 서구식 웨딩드레스가 막 도입되던 시기라 30년대 빈티지 웨딩드레스를 재현하기로 했다. 하지만 액션신이 많다보니 ‘기능성’이 문제가 됐다. 조 감독은 “늘어진 부케와 드레스 자락 안에 채워진 가터벨트를 이용해 무기를 숨기도록 해서 해결했다”고 말했다.
송나라 사신 책에서 고려 복장 유추
홍이 감정 따라 옷 색깔 변해
초반 초록·연두색…점점 어두워져
<협녀> 유백의 갑옷 ‘경번갑’, 한땀한땀 4개월…고작 3㎏
홍이(김고은)는 캐릭터가 변해감에 따라 옷의 색감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담아냈다.
■ 고려 복식 고증 어려움…이병헌 갑옷만 4개월 소요
<협녀>는 ‘고려’라는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무협’이라는 장르의 특성도 고려해야 했다. 조 감독은 송나라 사신이 고려인의 복식 등을 기술한 <고려도경>(1123)에서 당시 복장을 유추했다. 또 고려불화의 문양과 그림 속 무사들의 착장 방식에서 유백(이병헌) 의상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협녀>에서 1500벌의 의상을 제작한 조 감독은 “고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배우의 액션이 돋보일 수 있도록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 등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며 “프리 프로덕션에만 5개월이 소요됐다”고 말했다.
맹인 여검객 월소(전도연)는 촉각이 예민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소재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움직임이 가장 덜 드러나는 가벼운 실크소재를 사용했고, 질감에 집중해 옷감을 골랐다. 홍이(김고은)는 캐릭터가 변해감에 따라 옷의 색감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담아냈다. 초반에는 초록·연두색 계열의 밝은 옷으로 홍이의 천진난만함을, 중·후반부로 갈수록 어두운 계열의 옷으로 슬픔과 증오를 표현했다. 가장 공을 들인 옷은 유백이 입은 갑옷 ‘경번갑’이다. 권력에 대한 야망, 언제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등 유백의 심리상태를 투영한 옷이다. 유백은 정적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잠을 잘 때도 옷 안에 이 갑옷을 입는다. 조 감독은 “<반지의 제왕> 갑옷 제작에 쓰인 소재를 뉴질랜드에서 공수해왔다. 구슬 모양의 알을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꿰매야 해 4개월이 걸렸다”고 말했다. 보통 갑옷은 20㎏이 넘지만, 이렇게 탄생한 ‘경번갑’은 무게가 3㎏에 불과했다.
류승완 감독 의견 전폭 수용
서민 느낌 물씬 ‘형사’ 그려내
발차기 전문 ‘미스봉’ 운동화 고집
<베테랑> 조태오의 슈트, 이탈리아 수입 원단의 기품
조 감독은 “황정민은 <부당거래>에서 이미 형사로 출연한 적이 있어 차별화가 중요했다. 전세값 걱정을 하는 평범한 가장이자 직업인인 형사 서도철(황정민)을 표현하기 위해 내추럴한 느낌의 아웃도어 점퍼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 서민적이고 활동적인 형사 VS 잘 빠진 재벌 3세
‘황소고집’ 조상경 감독도 <베테랑> 만큼은 류승완 감독 의견을 전폭 수용했다. 수개월 동안 형사들을 인터뷰했다는 류 감독이 원한 것은 ‘리얼함’. 직업에 충실하면서도 서민느낌이 나는 형사와 타이트하게 잘 정돈된 재벌 3세를 극명하게 대비시키자는 주문이었다.
조 감독은 “황정민은 <부당거래>에서 이미 형사로 출연한 적이 있어 차별화가 중요했다. 전세값 걱정을 하는 평범한 가장이자 직업인인 형사 서도철(황정민)을 표현하기 위해 내추럴한 느낌의 아웃도어 점퍼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조태오(유아인)는 ‘고급’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를 만큼 잘 빠진 수트로 방향을 설정했다. 콘셉트는 조 감독이 잡았지만, 제작은 씨이오 의상을 실제로 스타일링 하는 남훈 패션디렉터와 협업했다. 남 디렉터는 “고급스러운 이탈리아 수입 원단을 사용해 화려함 대신 기품을 더한 재벌가 자제의 모습을 담아내려 했다”고 말했다.
관심을 모은 또 다른 인물은 ‘미스 봉’ 장윤주. 톱 모델이 평범한 형사 역을 맡았기에 최대한 몸매를 드러내지 않도록 했다. 청바지, 점퍼에 발차기가 쉬운 운동화 등 철저한‘ 생활룩’을 고집했다. 유일하게 ‘튀는’ 첫 장면의 ‘핑크색 벨벳 트레이닝복’은 “이 정도 오버는 괜찮다”는 류승완 감독의 선택이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사진 각 회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