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암살> <베테랑>이 1000만명을 넘어섰다. 2012년 <도둑들>과 <광해>를 시작으로 4년 연속 ‘쌍 천만 시대’를 이어갔다. 연말에도 1000만을 노리는 대작들이 기다린다. 한해 개봉하는 1000편 중 1000만을 넘는 0.5%의 비결은 뭘까? 그 비밀을 탐색하는 담론도 활발하다. 길종철 한양대 연극영화과 교수, 한순호 영화 마케터, 쇼박스 김도수 한국영화본부장에게서 1000만 관객을 부르는 스토리텔링, 마케팅의 법칙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이야기가 천만명의 관객을 모을까? 씨제이엔터테인먼트 국내사업 대표를 지낸 길종철 교수가 지난 2일 영화비즈니스 전문 아카데미 로카에서 열린 ‘천만 영화 스토리텔링의 비밀’이란 강좌에서 ‘천만 서사’의 5가지 요건을 짚었다.
■ 단독 주인공 천만 영화에선 주동자가 중요하다. 인권변호사를 모델로 한 영화 <변호인>(2013년 12월, 1130만명)이나 이순신 장군을 다시 불러온 <명량>(2014년 7월, 1761만명)은 물론이고, 배우 이병헌이 왕과 만담꾼 1인2역을 한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년 9월, 1298만명)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영화의 운명을 결정한 사례다. 하나로 집중될수록 소통과 감정의 힘이 커진다. 최동훈 감독은 <도둑들>(2012년 7월, 1298만명)과 <암살>(2015년 7월, 1270만명)에서 주인공을 여럿 내세웠지만, 목표와 가는 길이 거의 비슷한 이들은 단독 주인공의 확장판인 집단 주인공이었다. <베테랑>(2015년 8월, 1341만명)의 형사팀도 마찬가지였다. 서도철(황정민) 형사팀은 목표를 위해 일심 단결한 한국형 팀을 보여주며 단독 주인공처럼 이야기를 하나로 이끌어간다. 반면에 <간신>이나 <순수의 시대>처럼 흥행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사극에선 주인공들이 여럿이거나 등장인물들이 각기 이야기를 끌고 가려고 했다.
■ 정서적 유대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하이 콘셉트’ 영화라고 부른다. 이해하기 쉬운 구성, 직선적인 줄거리, 보이는 사건에 집중하는 전략 등을 내세운다. 하지만 대형 영화를 만들면서도 인물의 마음속 이야기에 공을 들이는 한국 영화는 ‘로 콘셉트’다. 한국 관객들은 영화와 정서적 가치를 공유해야 하고 주인공에게 몰입할 수 있는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국제시장>(2014년 12월, 1426만명)은 “사실 선장이 되고 싶었다”는 덕수(황정민)의 무의식적·내적 욕망을 영화 전반에 깔고 있다. <명량>은 조선의 존망을 목전에 둔 이순신(최민식)의 내적 갈등과 두려움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를 영화 곳곳에 깔았다.
■ 다층적 갈등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암살>의 전선은 여럿이다.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 민족,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독립운동가 내부에서도 변절과 노선 갈등으로 길이 엇갈린다. 친일파를 아버지로 둔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은 이런 갈등을 함축하고 있는 인물이다. <변호인>에서도 ‘삼류’ 변호사인 송우석이 인권 변론을 맡으면서 시대와 불화를 빚기 시작하고, 자신이 속한 법조인 사회와의 불화, 내적 갈등을 차례로 겪는다. 할리우드 영화는 한 가지 갈등만을 다룬다. 영화 <마션>에선 우주라는 환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만 집중한다. 9월 개봉했던 미국 산악영화 <에베레스트>는 인간과 산의 사투를 그렸지만 16일 개봉할 한국 산악영화 <히말라야>는 인간들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내적 갈등, 자신이 속한 집단과의 갈등, 거대한 갈등 등 주인공이 여러 수준의 갈등에 천착한다는 것이 한국적 스토리 라인의 특징이다.
■ 중심 아이디어 “백성을 사랑하면 임금이 될 수 없사옵니다.” <광해:왕이 된 남자> 이야기를 만들었던 중심 아이디어다. 나중에 편집을 거치며 이 대사는 빠졌지만, 현실에는 우리가 바라는 임금이 없다는 역설을 보여주기 위해 가짜 임금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서사의 축을 이뤘다. <베테랑>은 영화 <공공의 적>에서 이성이나 논리로는 잡을 수 없었던 범죄인들을 범인보다 훨씬 폭력적인 주인공 형사가 잡는다는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암살>의 중심 아이디어는 영감(오달수)의 “우리 잊으면 안 돼”라는 대사였다. 영화 후반부에 가서 관객들은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듣고 전율을 느낀다. 기획 단계에서 이런 중심 아이디어가 확실히 있었는지, 끝까지 집중했는지에 따라 감동의 크기가 달라진다.
■ 익숙한 이야기 <국제시장>의 부성애, <명량>의 충성심, <변호인>의 정의감 등 천만 영화의 특징은 낯익은 이야기였다. 대중영화는 이런 이야기 유형에 기대서 만들어진다. 결국 영화는 이야기다. 5가지 요건을 하나의 이야기에 어우러지게 담아내는 스토리 디자인이 영화의 성패를 좌우한다.
1993년 영화 <서편제>가 100만 관객을 모을 때까지 3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2014년 7월 개봉한 <명량>은 12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넘었다. 책 <천만 관객을 위한 10가지 법칙, 영화 마케팅의 모든 것>을 낸 한순호씨는 한해에 2편씩 1000만 영화가 나올 수 있게 된 비결로 ‘그릇의 변화’를 꼽는다. 첫 천만 영화가 나오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은 멀티플렉스가 자리잡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멀티플렉스 확장으로 전국 스크린수 2200개를 넘긴 지금 다시 불붙은 천만 영화 붐은 디지털 영사기 도입 영향이 크다. 2011년 극장가엔 하루 6회까지도 상영할 수 있는 디지털 상영 방식이 자리잡으면서 <도둑들>과 <광해>가 연이어 나올 2012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순호씨는 자본과 경영이 결합한 지금의 천만 영화 공식을 △강력한 배급사 △여름·겨울방학 개봉 △사회적 이슈 △시대적 상황 △마케팅의 힘으로 정리한다. <명량> <광해> <국제시장> <베테랑> 등 천만 영화 클럽에서 멀티플렉스 극장 씨지브이와 같은 계열의 씨제이엔터테인먼트가 선전했고, 멀티플렉스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배급력에선 뒤지지 않는 쇼박스도 <도둑들> <암살> <괴물> 등을 천만 영화 대열에 올렸다. 멀티플렉스 극장 롯데시네마를 갖고 있는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아직도 천만 영화를 내놓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지금의 천만을 좌우하는 것은 우선 배급의 힘이다. 천만 영화로 가는 시간이 짧아지면서 짧은 기간 관객을 모으기 위해선 초성수기에 개봉하는 것이 중요하다. 추석을 앞두고 개봉한 <광해>가 유일한 예외다. 쏠림 현상이 이루어지려면 사회적인 공통 이슈가 있어야 한다. <변호인>과 <명량>은 ‘올바른 지도자상’, 올해 <베테랑>과 <암살>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분노라는 공통 주제가 있었다. 천만 영화는 관객 입소문이 만든다고 하는데, 그렇게 될 때까지 초반 마케팅을 잘 타는 것도 중요하다. <해운대>는 원래 우리나라 최초 재난영화로 특수효과를 강조했지만 괴수 재난 영화인 <차우>와 대결하게 되자 “쓰나미도 휩쓸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로 바꿔버렸다. <베테랑>은 오락 액션물로 홍보하면서도 ‘재벌 2세’ ‘갑질’을 짐작할 수 있는 말로 포스터를 채웠다.
천만 영화를 만든 것은 사람들이다. 특이한 것은 천만 영화 단골 주인공은 인기나 외모가 아닌 연기력을 갖춘 40대 이상 남자 배우라는 것이다. 천만 영화에 2번 이상 출연한 배우는 송강호(<괴물>, <변호인>), 류승룡(<7번방의 기적>, <광해>, <명량>), 설경구(<해운대>, <실미도>) 등이다. 김도수 쇼박스 한국영화팀 본부장은 “<변호인> <암살> 등 갈수록 묵직한 소재와 이야깃거리가 중요해지는 추세라 배우의 내공과 연륜이 받쳐줘야 가능한 역할이 대부분이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인기는 특정 연령대에 국한되기 쉬운데 모든 연령대를 타깃으로 하는 천만 영화는 인기보다 신뢰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감독은 사정이 좀 다르다. 윤제균 감독은 <해운대>에 이어 <국제시장>으로 두편의 천만 영화를 만들었다. 최동훈 감독도 <도둑들>과 <암살>로 천만 영화에 두편을 올렸다. 천만 영화 감독의 요건으론 대중들이 이름을 알 만한 인지도, 스타급 배우들을 캐스팅할 수 있는 능력, 기획력 3가지를 꼽는다. 쇼박스 김 본부장은 “기획과 캐스팅에 감독의 연출력이 덧붙는다면 금상첨화지만 때론 중견·신인 감독을 활용해 대형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배우층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대형 영화를 만들 때는 남자 배우 캐스팅이 관건”이라고 했다.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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