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사진 뉴 제공
1917년 12월20일, 일본 도쿄 제국호텔 대연회장에선 진귀한 파티가 열렸다. 표범, 곰, 노루 등 역시 조선에서 포획해온 야생동물들의 박제로 꾸민 행사장에선 200명 넘는 일본 고관대작들이 모여 조선에서 잡아온 호랑이 고기를 나눠 먹었다고 <정호기>(에이도스 펴냄)는 전한다. 책을 쓴 야마모토 다다사부로는 조선 명포수들을 고용해 조선 호랑이 사냥을 기획하고 실행했던 인물로 영화 <대호>에서 군대까지 동원해 호랑이를 사냥하는 일본 고위관리 마에조노(오스기 렌)는 이 사람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짐작된다.
박훈정 감독, 관객들이 좋아하는
항일·선악 대결 이분법 벗어나
가여운 생명체 주제담아 큰 진전
험한 길 스스로 택한 160억 대작은
흥행수익 4위·관객수 145만명
박감독 “민족주의 자극말자 했다”
당시 조선의 호랑이 사냥꾼들은 외국 군대까지 인정할 정도로 사격기술이 뛰어났지만 대부분 구경이 작은 단발 엽총밖엔 없어서 한번에 급소를 맞히지 못하면 거대한 맹수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여러 발의 총을 맞고도 사냥꾼들을 공격한 영화 속 대호는 이런 사실을 근거로 했을 것이다. 영화 <대호>가 가장 특이한 것은 조선 호랑이 씨를 말린 일본이라는 가해자와 호랑이라는 피해자, 혹은 악과 선의 이분법으로 풀어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조선 포수라는 능동적이면서도 일본에 등을 떠밀리는 주체를 상정한다. 산군을 경외하는 최만덕(최민식) 같은 포수도 있지만 복수하고 싶은 욕망에 쫓겨 도에 넘는 사냥방법을 자행한 구경(정만식) 같은 포수도 있다. 호랑이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것처럼, 인간도 그렇다.
최근 한국 영화에선 편이 분명하고 극적인 대결이 솜씨있게 전개되는 영화만 관객몰이에 성공하는 경향이었다. 이분법을 벗어나 인간과 짐승을 모두 살아 있는 가여운 것들로 바라본 이 영화는 주제의식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뤄냈다고 볼 수 있지만 바로 그 주제의식 때문에 관객들의 호응을 쉽게 얻지 못하고 있다. 조선 호랑이라는 소재나 감독의 전작인 <신세계>등을 통해 팬들이 예상했던 블록버스터식 전개 방식을 벗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개봉 13일째 관객수 145만명, 박스 오피스 4위. 부러 험한 길로 올라간 <대호>는 점점 벼랑으로 밀려나고 있다. 제작비 160억원을 들인 영화가 조선 호랑이가 절멸한 슬픈 역사를 바탕으로 일본을 저격하는 항일 영화나 호랑이와 포수의 대결을 숨막히게 몰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외다.
박훈정 감독은 <한겨레>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민족주의를 자극할 이유로 반일·항일 영화론 만들지 말자고 했다. 일본인들이 호랑이를 멸종시키기는 했으나, 호환을 방지한다는 것은 핑계였고 정말 조선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의도였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속내는 고위 일본 관리들의 호사취미였다. 이 영화는 그 시대를 살아낸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또 영화평론가 이용철씨는 “아이를 살리지 못하는 아버지의 무력감, 새끼를 내어준 호랑이의 슬픔은 2014년 4월16일 우리가 느꼈던 슬픔과 비슷하다”며 “이 영화는 시간을 앞으로 되돌리고 싶은 희망을 반영하지만 어떤 판타지도 허용하지 않는 영화”라고 분석했다.
영화에서 새끼를 잃은 호랑이와 자식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인간 아비는 같은 소리를 내며 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항일·선악 대결 이분법 벗어나
가여운 생명체 주제담아 큰 진전
험한 길 스스로 택한 160억 대작은
흥행수익 4위·관객수 145만명
박감독 “민족주의 자극말자 했다”
영화 '대호'의 한 장면. 사진 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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