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거
수영 4등하면 왜 안돼요? ‘4등’
만년 4등 12살 준호, 체벌로 만든 2등
가해·피해 구도로 인권 다루지 않아
만년 4등 12살 준호, 체벌로 만든 2등
가해·피해 구도로 인권 다루지 않아
소수의 저항은 존엄하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감옥 투쟁을 그린 <헝거>와 터키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은 <무스탕:랄리의 여름>은 그 사회 가장 약자들의 저항을 비춘다. 정지우 감독의 영화 <4등>도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갖가지 폭력의 스펙터클을 통해서 스크린 속 고통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이들 영화를 그냥 지나치기는 어렵다. 중요한 질문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가 사회적 약자들의 항의를 부당한 방법으로 짓밟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질문이다. 인권 감수성을 일깨우는 스크린의 이 질문들은 이전보다 좀더 경쾌하고 세련되다.
■ 몸을 비추는 영화 <헝거> 1981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만들어진 아일랜드공화국군 조직원들은 메이즈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테러리스트로 간주됐던 이들은 정치범으로 대해 달라며 처우개선 투쟁에 들어가지만 당시 영국 수상이던 마가렛 대처는 요지부동이었다. 급기야 수감자들은 죽음을 무릅쓴 옥중 단식투쟁을 감행하게 된다. 17일 개봉하는 <헝거>는 바로 이 단식 투쟁을 이끈 보비 샌즈의 이야기를 그렸다.
카메라는 수감자의 유일한 무기가 된 육체를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비춘다. 죄수복을 걸치길 거부하고 맨몸으로 감옥에서 버티는 수감자들의 마른 몸뚱아리와 배설투쟁으로 대변을 벽에 바르고 소변을 밖으로 쏟는 광경에서도 어떠한 감정을 충동하기보다는 관객을 폭력에 대한 관찰자이자 증언자로 남겨둘 뿐이다. 보비 샌즈 역을 맡은 마이클 패스벤더는 10주 만에 몸무게 14kg을 빼고 후반부를 찍었다고 한다.
<헝거>는 한국엔 늦게 도착한 영화다. 2008년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협회상을 받을 당시 스티브 맥퀸 감독은 “이 영화는 몸이 정치적 전쟁의 장이 되어가는 시대에 국가가 개인을 어떻게 보는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에 대한 영화”라는 말을 남겼다.
■ 당당한 무슬림 소녀 <무스탕:랄리의 여름> 역시 17일 개봉하는 <무스탕:랄리의 여름>은 지난해 제작됐지만 오래 전 만들어진 듯한 영화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삼촌 손에서 키워지는 다섯 자매는 평화롭고 자유분방한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바닷가에서 남자아이들과 함께 물장난한 것이 마을의 구설에 오르면서 평화는 깨진다. 병원에 가서 순결 검사를 받고, 집안에 갇혀서 신부수업을 받다가 차례로 팔려가듯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 과연 지금 시대 이야기인지 의문이 들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옛 풍속이 강한 터키의 지방에선 많은 여성들이 혼전 순결을 잃을 경우 명예살인이나 자살 중 하나를 선택하기를 강요당한다. 영화 속 소녀들이 “이스탄불로 가자”고 외치는 건 그 때문이다.
이슬람 여성들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영화들은 여럿 있었다. <무스탕:랄리의 여름>이 독특한 건 다섯 자매의 활기가 그들을 억누르고 있는 낡은 관습을 압도한다는 점이다. 주눅들거나 좌절하는 대신 이스탄불로 가는 길을 찾으려 하는 막내 랄리는 여지껏 이슬람권 영화의 비극적인 여자 주인공들과 다른 빛깔이다. 직접 각본을 쓴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감독은 <물 한 방울>이라는 단편 영화에서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회를 그린 바 있는데, 그 사회에 반기를 든 여성의 이름도 랄리로, 그 땐 감독이 직접 랄리를 연기했다.
■ 스포츠 선수들의 인권 <4등> 4월14일 개봉하는 <4등>도 <무스탕:랄리의 여름>만큼이나 청량한 빛깔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12번째 인권영화로 제작된 이 영화는 스포츠 선수, 그것도 수영 선수를 택했다.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에서 벗어나는 시각도 독특하다.
언젠가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은 꿈을 품고 있는 12살 준호(유재상)는 현실에선 만년 4등이다. 유능하다고 소문난 코치는 엄마에게 자신의 훈련방법에 대해선 절대 참견하지 말라고 다짐한 뒤 준호를 가르친다. 그의 훈육법은 아이가 견디기 힘든 매질이다. 전 국가대표 수영선수였던 코치 자신도 대걸레로 두드려 맞으며 운동을 해왔다. 그에겐 매질은 당연한 훈육법의 하나일 뿐이다. 드디어 은메달을 따던 날 아빠는 준호가 체벌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당장 수영을 그만두도록 한다.
아이는 물 속에 있을 때 편안하고 행복한데 물 밖은 모두가 박태환이 되기 위해 물보라 대신 피를 튀겨야 하는 세계다. 영화는 꿈을 가진 소년과 목적만을 생각하는 어른들의 갈등을 주조로 하되 ‘수단방법 안가리는 어른들=나쁜 사람’이라는 등식을 거부하고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로 그린다. 정지우 감독은 “악당과 피해자가 나뉘는 단순한 구도가 아니라 모두에게 폭력적 상황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리 삶의 단면을 세밀히 들여다 보는 것, 요즘 영화가 인권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각 배급사 제공
무스탕:랄리의 여름
4등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