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미·조성은·이현정·윤가은 감독
<비밀은 없다>·<우리 연애의 이력> 등
독특한 시선과 새로운 어법의 여성감독 4인
<비밀은 없다>·<우리 연애의 이력> 등
독특한 시선과 새로운 어법의 여성감독 4인
23일 개봉하는 <비밀은 없다>(감독 이경미)와 <삼례>(감독 이현정), 29일 개봉하는 <우리 연애의 이력>(감독 조성은), 16일 개봉한 <우리들>(감독 윤가은) 등 최근 개봉하는 영화 4편은 모두 여자 감독이 만든 작품들이다. 한해 개봉하는 영화에서 5% 남짓한 여자 감독들의 영화가 한날한시 극장에 모인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영화가 한결같이 섬세하고 참신한 것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성애가 스릴러적인 서사를 이끌어가는 <비밀은 없다>, 정곡을 찌르는 대사가 압권인 <우리 연애의 이력>, 어른들 마음에 볼록거울을 대는 <우리들>, 실험적인 이미지와 사운드의 <삼례> 등 여자 감독들의 렌즈는 깊고 정교했다. 여자들이 절대 다수 관객으로만 존재했던 영화의 세계에서 태생적으로 기존 영화판의 어법을 깨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들 4명의 여자감독을 인터뷰했다.
■ <비밀은 없다> 이경미
이경미 감독이 전작 <미쓰 홍당무>를 발표하던 그해, 나홍진 감독이 <추격자>를 세상에 내놓았다. 2008년은 주목할만한 두 신인감독의 등장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올해 공교롭게도 <곡성>에 이어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가 관객들을 찾는다. 나홍진 감독과 종류는 다르지만 이경미 감독의 집요함도 여전했고 <비밀은 없다>는 <곡성> 못지 않게 비밀과 미끼로 가득한 영화다.
“망해라 세상아.” 이경미 감독은 제작기에 그 8년 동안의 좌절을 이렇게 적었다. 영화는 감독이 몇년 동안 끌어안고 있던 <여교사>라는 제목의 시나리오가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나서 박찬욱 감독과 함께 <불량소녀>라는 제목으로 시놉시스를 썼던 것을 <비밀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완성했다. 이 3가지 제목에 영화가 담고 있는 비밀이 있다. 한 유력 국회의원 후보(김주혁)의 딸(신지훈)이 선거를 앞두고 실종된다. 딸을 찾아나선 엄마(손예진)는 예상치 못했던 딸과 남편의 비밀과 맞닥뜨린다. 딸을 찾고 싶은 엄마의 안타까운 감정을 따라 파도를 탈 준비를 하던 관객들은 예상치 못했던 조류와 암초에 갇힌다.
“영화 초반부엔 상식과 이해를 벗어나는 인물과 감정을 그리려 했다. 그 인물이 영화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관객의 마음과 만났을 때 감동이 더 크리라 예상했다”는 감독은 “이 이야기는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예측가능한 공식을 거부하며 그 사랑을 향해 가는 길이 험난하다. 언론시사가 끝나자 비평은 영화에 대한 격렬한 반대와 사랑의 두 갈래로 갈라졌다. 20일 서울 왕십리에서 열린 브이아이피 시사회를 앞두고 이경미 감독을 만났을 때 옆에 있던 이해영 감독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누가 이렇게 끝까지 달릴 수 있을까. 지독하다”고 감탄했다.
장르와 관념의 공식을 깨는 것이 목표인 듯 보이는 이 감독을 ‘여자 감독’이라는 틀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비밀은 없다>에서 소녀들과 어른들의 세계를 탐구할 때 보이는 감성들은 감독이 여자가 아니었으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감독은 ‘안드로메다에서 온 여자들’로 불리는 밴드 무키무키만만수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영화의 소리를 빚어낸다. 소녀들의 비밀공간도 마찬가지다.
이경미 감독 자신도 “감독으로서 성취해야 하는 것들의 폭을 넓혀야 하고 남들이 걷지 않은 길에서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데 스스로를 여성감독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한다. “그래도 여자 감독이라서 좋은 점이 있어요. 지금까지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많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훨씬 많아요. 게다가 여자들은 진보적인 좋은 남자, 같이 소통하고 비전을 만들 수 있는 남자들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이 높기 때문에 좋은 파트너를 찾아내지요.” 여성감독으로 들어오는 길목은 좁지만 움직일 수 있는 세계는 넓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 <우리 연애의 이력> 조성은
“대사를 쓰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로맨틱 코미디 <우리 연애의 이력>은 조성은 감독의 이력에서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이전 단편영화들은 무성영화(<다시 찾은 크리스마스>)이거나 거의 대사가 없었다(<숲의 딸들>). 그에 비해 <우리 연애의 이력>은 요즘 멸종한 거 아닌가 싶었던, 대사가 맛깔난 로맨틱 코미디다.
아역 배우 출신의 우연이(전혜빈)와 조감독 오선재(신민철) 둘은 이혼 도장을 찍고도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계속 만난다. 그런데 영화화되면서 당연히 주인공 역을 맡으리라 생각했던 우연이는 오디션을 보라는 말을 듣는다. 둘은 티격태격 싸우고 겁나게 싸우고 갈 데까지 싸운다. 공동작업한 시나리오 책을 찢어서 나눠가지면서 자신의 저작권을 조목조목 주장하는 장면이 절정이다. “최대한 그들의 공방이 끝까지 가게 해보자”고 했다. 전혜빈의 연기는 ‘올해의 발견’감이다. “워낙에 차분하고 단단한 느낌의 배우인데, 그 단단함을 얻기까지 많은 시간 흔들렸다더라.”
영화 곳곳의 힙합 연출부나 동사무소 직원 같은 단역이 참 자연스럽다. 현장에서의 실험이 한몫 한 지도 모른다. “일하면서 욕심은 딴 데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신경을 쓴 부분이다. “기술 스태프라도 다 같이 공동으로 똑같이 기여하고, 똑같이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고 싶었다.” 감독은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다. 폴란드 우쯔 국립영화학교의 트레이닝 코스를 마친 뒤 영화 연출부 일을 하지도 않았다. 에이전시나 비디오제작소를 다니며 본격적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성향도 그렇고 협업이나 공동작업에 대한 적합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영화감독이 현장에서 일하는 방식과 맞을까 하는 고민을 해왔다.”
그는 감독을 ‘업무’로서 접근했다. “정확한 판단을 적절한 때에 내리는 게 감독의 일이다. 충분히 상의하고 상대방의 말을 듣지만 결정에서 머뭇거리지는 않았다. 기능직으로 연출을 대해보고 싶었다.” 영화는 예산 4억원을 넘기지 않고, 기한을 어기지 않고 일정을 맞춘 뒤 개봉까지 이르렀다.
정작 조 감독은 영화를 마친 뒤 현재 맡은 업무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30일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집에서 45일 된 쌍둥이와 밤낮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엄마 업무가 제일 어려운 것 같네요. 일이 끝이 없어요.”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삼례> 이현정
“삼례는 곡성에서 무궁화호로 1시간 거리에 있다. <삼례>도 <곡성>처럼 무당과 성당이 등장하는데, 자연환경이 무엇보다 ‘종교적’이다.”
영화 <삼례>에서 주인공은 영화감독 이승우(이선호)이다. 이선호는 “미친 힘에 의해 엮인 것”처럼 삼례를 찾지만, 읍내 시장을 둘러본 뒤 기껏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허기를 해결하는 어쩔 수 없는 도시 남자다. “세련됐다는 게 육감적이고 충동적이고 인간일 수 있는 것들을 다듬어서 쌀 도정하듯이 사라지는 것”이라며 감독은 “원초적인 것을 항상 더 탐구”해왔다고 말한다. 원초적인 것은 여성적인 것으로 연결된다. 이승우에게 유희인(김보라)은 “관광객은 삼례를 구경하지만 삼례 사람들은 관광객을 구경한다”고 말한다. 이현정 감독은 ‘여성적 화법’에 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다.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분위기나 결을 통해 살리려고 했다. “영화관에서 물속에 잠기듯이 느끼기를 바란다.” 그래서 모성적 자연이 펼쳐지고 물 흐르는 소리가 시종일관 흐른다.
모성적 자연은 우주적으로 확장한다. 감독이 어린 시절 본 이미지가 매개로 등장한다. “외갓집에서 할머지가 닭의 배를 갈랐는데, 닭의 배에 곧 나올 달걀과 그 다음 나올 달걀이 줄을 서 있었다. ‘배 속에 우주가 있네’라고 생각했다.” 닭의 배에서 선호가 보는 알은 우주를 도는 천체 이미지로 변화한다. ‘알을 깨는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선호가 읽는 <데미안>의 주요 대목이자, 희인이 인터넷 방송을 통해 인용하는 구절이다.
‘우주’는 짧은 시간 안에 완성하기 위해 그래픽이 아니라 게임엔진으로 작업했다. 백악기 중생대의 화석 같은 삼례 바닷가 절벽 촬영에도 공을 들였다. 오메가라는 특수장비를 사용하여 찍었다. 위아래가 없는 우주의 이미지처럼 카메라는 절벽을 유영한다.
과거를 탐색해가며 동학 때 숨진 ‘이소사’가 등장한다. 1894년 동학혁명의 시작이 삼례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이소사에 가해진 끔찍한 고문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나라를 구했지만’ 역사 속에서 잊혀져버린 것이 이현정 감독이 삼례를 찾아간 이유다. “현재나 미래나 과거나 상관없이 그 공간에 들어가면 영향을 받게 된다. 잊어버린 역사를 환기시키고 싶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 <우리들> 윤가은
아역배우들에게 그날그날 ‘쪽대본’을 주면서 상황과 역할은 알려주되 배우들이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대사를 만들도록 했던 영화 <우리들>의 제작현장에는 독특한 점이 또 하나 있었다. 제작 스태프들의 남녀 비율이 거의 비슷했다는 점이다. “성비를 맞추려고 한 것은 아닌데, 무의식적으로 균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던 것 같아요. 영화는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작업이고, 관객 비율도 여자 남자가 비슷한데 지금까지 제가 경험했던 상업 영화현장엔 남자가 더 많았죠.” 윤가은 감독(사진)의 말처럼 <우리들>은 감독과 조감독을 비롯해 연출부는 전부 여자였으며 미술·음악·편집·믹싱 감독도 여자였다. 이들은 1억5000만원 제작비로 30회차를 촬영하는 놀라운 사례를 남겼다.
감독의 십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우리들>은 어린 여자아이들이라는 이제껏 한국영화엔 드물었던 주인공을 불러냈다. <우리들> 이전에 만들었던 단편 <콩나물>과 <손님>에서도 어린 여자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 씨앗을 내 안에서 찾다보니 유년기의 감정, 경험했던 이야기들을 영화로 풀어내게 된다”고 설명한다. “사실 한번도 아이들이 삶의 주체가 아닌 적은 없었다. 어른들의 영화에선 그걸 잊어버리고 단순한 장치처럼 활용했을 뿐”이라는 것이 윤 감독의 생각이다. “<우리들> 이야기를 오랫동안 품고 다녔지만 어린이 주인공으론 투자를 못받으면서 고등학교나 회사를 배경으로도 써봤는데 결국 초등학생들의 세계로 돌아왔어요. 아이들이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생생한 날 것으로 그려질 때 실제 아이들이 느끼는 감정을 면밀히 들여다 볼 수 있으며 우리들이 거쳐온 어떤 시절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들>은 초등학교 4학년 교실을 무대로 주인공 선이의 외로움, 불안함, 화나는 마음에 차례로 점을 찍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가는 영화다. 선이의 감정을 따라가는 어른 관객들은 아직 우리 안에 있는 기억과 감정이 뜨겁게 공명함을 느끼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소녀들이 인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 같다”는 윤가은 감독의 주제는 당분간 ‘여자’다. “영화 이전에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여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요. 영화라는 것도 결국 사회의 자장 안에 있으니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자로서의 삶이 담기지 않을 수가 없을 거에요.”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비밀은 없다>로 8년만에 복귀한 이경미 감독.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비밀은 없다>의 한 장면.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우리 연애의 이력> 만든 조성은 감독. 모멘텀 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우리 연애의 이력>. 모멘텀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우리들> 윤가은 감독.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우리들>.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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