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작 <환상의 빛>에서 최신작 <태풍이 지나가고>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소재는 언제나 ‘가족’이었지만 그 가족을 통해 드러내려고 했던 정서는 서늘한 절망에서 낙관적 위로로 변해왔다. <환상의 빛>의 한 장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 <환상의 빛>(7일 개봉)과 최신작 <태풍이 지나가고>(28일 개봉 예정)가 나란히 한국을 찾았다. 고레에다의 출발점과 현재를 같은 시기에 볼 수 있는 것은 관객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를 ‘고 감독’이라고 부르며 좋아하는 한국팬들 덕분에 일본 영화 부진 속에서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모두 관객 10만명을 넘겼다.
고레에다 감독은 다큐멘터리 작풍으로 출발해 따뜻한 가족 서사를 발전시켜왔다. 우리가 고레에다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의 데뷔작과 현재작에 있다.
여기가 시작이다. <환상의 빛>은 티브이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스타일뿐만 아니라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등 그를 영화로 이끌었던 사람들의 영향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영화다.
가족 중 하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남은 가족들은 상실과 절망감에 갇힌다. 더군다나 그 가족이 스스로 죽음을 찾아 떠났다면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평생의 질문을 안게 된다. 유미코(에스미 마키코)는 어릴 때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행방불명되자 가끔씩 묻는다. “내가 그때 집을 나가던 할머니를 붙잡았더라면 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시지 않을까요?” 결혼을 해서 그 상실을 메워줄 수 있는 가족을 얻었지만 어느날 밤 남편 이쿠오(아사노 다다노부)마저 돌아오지 않는다. 그뒤 영화는 깊은 침묵 속에 잠긴다. 영화 막바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주인공이 바닷가의 장례 행렬을 쫓아가는 장면은 우리가 20년전의 이 영화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다.
이후 고레에다는 다른 길로 나아갔다. 영화평론가 김봉석은 “인물들에게 이입하지 않고 관찰하고 관조하는 그의 스타일은 <아무도 모른다>(2004)부터 전환기를 맞았다. 이 영화는 그가 가족 이야기에 천착하며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게 된 시작”이라고 요약한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고레에다 감독은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라는 이상향과 동시대 타이완 뉴웨이브 감독들을 모델로 삼아 영화에 발은 딛은 뒤 계속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탐색해왔는데 그 과정의 긴장이 완벽히 드러난 작품이 <걸어도 걸어도>(2008)였다”고 했다.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문제점과 모순을 효과적으로 강렬하게 드러낸 <걸어도 걸어도> 이후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에서 가족과 평화로운 세계에 정착한 고레에다의 영화들은 관객을 늘려갔지만 평단에선 전작만큼 지지를 얻지 못했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고레에다의 여정중 어디쯤 있는 영화일까? <걸어도 걸어도>에서 모자로 나왔던 아베 히로시와 키키 키린이 다시 아들과 어머니 역할을 맡았고, 생활력 없고 무능한 주인공이 아버지로 나오는 것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태풍…> 속 아이는 <…기적>처럼 부모가 한데 합쳤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갖지 않는다. 그런 희망을 갖는 사람은 나이든 할머니밖에 없다. 이 영화는 고레에다표 가족영화의 연장선이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봉합이나 마무리는 불가능하다는 초반작의 현실인식을 불러낸다. 어릴적 자신이 살았던 동네 연립단지를 모델로 각본을 쓰기 시작했다는 감독은 “<태풍이 지나가고>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내 속에 일어난 변화를 포함해서, 나의 현재를 가장 많이 반영한 작품”이라고 했다.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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