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물 마니아들은 좀비물 전형성에 일종의 ‘애증’을 가진 듯싶다. ‘뭔가 다른 게 없나’ 싶다가도 피 튀기는 좀비 격퇴 신이 빠지면 서운해한다. 영화 <아이 엠 어 히어로>(감독 사토 신스케)는 두 가지 모두를 만족시킨다. 말도 하는 ‘감정좀비’를 선보이는가 하면, 후반부에선 고어물에 익숙한 이들도 흠칫 놀랄 좀비 격퇴 신이 제대로 시선을 훔친다. ‘좀비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좀비물 특유의 일깨움도 잊지 않는다. 원작은 세계에서 600만부가 팔린 하나자와 겐고의 동명 만화다.
주인공 히데오(오이즈미 요)는 만화가 어시스턴트다. 십 몇 년 전 신인상을 수상했건만 차기작은 감감무소식이다. 쏘지도 못하는 엽총을 고이 모셔놓기만 하는 모습은 그의 인생을 꼭 닮았다. “난 대기만성형” “내일의 만화왕”이라 자위하지만 여자친구는 “넌 특별하지 않아”라는 막말만 남기고 돌아선다.
이 ‘루저’도 달리기만큼은 자신있는지 정체불명 바이러스 ‘ZQN’으로 난리가 난 도심을 우연히 만난 여고생 ‘히로미’(아리무라 가스미)와 함께 탈출한다. 어렵사리 생존자들이 모인 후지산 중턱 한 쇼핑몰에 합류하지만 생존자들 간 알력다툼, 식량부족 등 산 넘어 산이다.
생전 기억과 습관이 남은 ‘감정좀비’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다. 좀비가 된 뒤에도 히데오의 전 여친은 “나만 불행해”라고 한탄한다. 갑질에 익숙했을 한 중년남성은 “우설 소금구이를 달라”고 난리다. 높이뛰기 선수였음이 분명한 청년은 고장난 인형처럼 도약을 반복하다 어느새 머리가 반쯤 날아갔다. 생존자 중 한명인 간호사 야부(나가사와 마사미)는 “어쩌면 과거 기억 속에 사는 좀비들이 우리보다 더 행복할지 모른다”며 한숨을 쉰다.
‘반좀비’도 좀비물 전형성에 균열을 내며 흥미를 더한다. 여고생 ‘히로미’는 몸의 반만 감염됐다. 공격성은 없지만 한쪽 눈은 이미 좀비를 닮았다. 생존자들이 ‘반좀비’ 히로미를 사람과 좀비 둘 중 무엇으로 여기느냐도 관전 포인트다. <부산행> 좀비들은 뛰기는 잘 뛰었지만 그 외 특성들이 크게 강조되지 않았다. 그에 견줘 <아이 엠 어 히어로>의 좀비들은 능력과 개성 면에서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영화지만 주무대인 쇼핑몰 등 약 70%를 한국에서 촬영했다. 한국 배우 100여명이 좀비로 열연했다. 극중 비중이 상당한 ‘높이뛰기 좀비’를 연기한 이용훈(23·한국체대 생활무용학과 졸업)은 원래 무용수다. 전문 선수에게 높이뛰기 동작을 전수받기도 한 그는 “분장에만 8~9시간이 걸렸다. 의외로 정적인 좀비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도 어려웠다”고 했다.
기차 안을 한국 사회 축소판처럼 그린 <부산행>에 비하면 <아이 엠 어 히어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소박해 보인다. 자기가 그린 만화 주인공마저 “평범하다”는 혹평을 듣는 히데오는 유독 이름을 말할 때 “한자로는 영웅”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그는 “그냥 히데오”라고 담담히 말한다. 영화 제목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청소년 관람 불가. 22일 개봉.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사진 영화사 빅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