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여성인권영화제 개막작 <테레즈의 삶>.
“주류 만화가 중에선 여성들을 과잉성애화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본능적인 미러링으로 여성들이 좋아할 묘사를 하는 것이다.” 11일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웹툰 <미지의 세계>를 그린 이자혜 작가의 말에 객석에선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작가가 “메갈리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러 악플에 시달려왔지만 지지 선언을 철회하거나 태도를 바꿀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말하면서 환성은 더욱 커졌다.
미국 만화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여성 만화가들을 조명하는 미국 다큐멘터리 <그녀가 꿀잼을 만든다>를 상영하고 난 뒤 열린 ‘영화 이야기’ 시간은 이자혜 작가의 발언이 깊어지면서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영화와 영화에 대한 이야기, 객석의 뜨거운 반응은 여성인권영화제 행사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올해로 10회를 맞은 여성인권영화제가 10일부터 열리고 있다. 상영 장소는 대한극장 단 1곳인 이 작은 영화제는 그러나 전투적 여성영화의 창구로 알려지면서 열혈 관객들을 낳았다. 10일 개막식에선 2살 때부터 엄마 손을 잡고 여성인권영화제에 참석했다는 임별(12) 어린이가 무대에 올라 개막 축하인사를 하기도 했다.
어느 때보다 전투적 여성주의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올해는 상영작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우선 한국여성영화 출품작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보통 해마다 100여편 정도가 영화제 경쟁부문인 ‘피움초이스’의 문을 두드린다. 올해 경쟁부문 응모작은 180편.
작품 경향에서도 변화가 두드러진다. 경쟁부문 심사에 참가했던 영화평론가 정민아씨는 “몇년 전만 해도 왕따, 실업, 사회생활, 가족 문제 정도가 주를 이루었는데 최근 데이트 폭력, 성폭력 이후 트라우마 등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급격히 늘었다”고 했다. 송란희 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는 “폭력이라고 해도 예전엔 여성에 대해 익히 알려진 폭력들을 소재로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주제의식까지 스며든 영화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는 폭력적인 구조와 여성이 처한 현실 그 자체를 탐구하는 영화가 많아졌다”고 했다. 유지나 동국대 교수도 “예술이 현실의 반영이라는 말은 올해의 여성영화에선 더없이 적절하다. 젊은 감독들은 문제 실상을 적나라하게 그렸고, 영화를 통해 무언가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다”며 “3세대라고 불리는 여성주의적 의식을 가진 감독들의 성장이 눈에 띈다”고 했다.
영화제가 이렇게 급작스러운 변화를 겪은 것은 ‘강남역 1번 출구’로 표현되는 여성주의의 급격한 확산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는 그대로지만 여자들은 변했다. 가령, 2006년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영화 <가정폭력2>를 개막작으로 삼아 첫번째 영화제가 열렸을 때부터 가정폭력을 주제로 한 한국과 외국의 여러 영화를 한데 모아 폭력적 현실을 드러내는 것은 영화제의 일관된 주제가 되고 있지만, 거기에 대항하는 영화 속 여자들의 태도는 달라졌다. 올해 경쟁부문에 진출한 한국 젊은 여성 감독들의 영화에서 여자들은 폭력의 가해자에게 주먹을 날리거나(<플라이>), 적극적으로 응징한다(<나의 기념일>). 사적 복수와 자위에 나설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이 나온 것을 두고는 여성 창작자들의 자의식이 급진화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라는 풀이가 나온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에게 일어난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나의 기념일> 홍지수 감독은 “한 컷 한 컷 정말로 용기내서 찍어야 했던 영화”라며 “가족관계에 갇혀 오랫동안 자신이 당한 폭력도 말하지 못했던 주인공 같은 사람들이 입을 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16일까지 열리는 여성인권영화제에선 20편의 국내 경쟁작 외에도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해외초청작, 10회를 기념하여 특별히 상영될 고전작과 앙코르작 등 13개국 46편의 작품을 선보인다.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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