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감독 하희진). 여성인권영화제 제공
제10회 서울여성인권영화제에 출품한 영화들은 대부분 20~30대 젊은 여자 감독들이 꼭 전하고 싶은 자신들의 현실을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여자들의 어떤 이야기가 영화가 됐을까. 180편 출품작 중 본선에 진출한 20편을 통해서 젊은 여성영화 감독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짚어봤다.
<여름밤>(감독 이지원). 여성인권영화제 제공
성장 이번 영화제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10대들의 이야기가 다수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올해 다양성 영화 개봉관에서도 십대 여자아이들의 관계를 그린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이 화제작으로 떠오른 일이 있는데, 아직 입봉하지 못한 많은 젊은 감독들도 여성성을 결정짓는 십대 여자의 특질에 주목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름의 끝>과 <연지>는 초등학교 여자아이들이 부닥치는 관계의 문제를 들추어낸다. <여름의 끝>은 초등학생 두 여자아이가 우연히 부모의 성관계를 목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유년은 끝났다. 한 여자아이는 어른인 양 받아들이고 다른 여자아이는 수치와 거부감을 드러낸다. <연지>는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는 여자아이가 함께 해수욕장에 가자는 제안에 기뻐서 집을 나서는 이야기다. 친구들의 거친 말이나 행동은 전혀 나오지 않지만 항상 홀로 걸어가는 아이의 외로움이 전달되는 영화다. <여름밤>의 주인공은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 돈으로 과외를 받는다. 일하고 공부하고 자기 것을 챙겨야 한다. ‘헬조선’의 암담한 현실이 십대에게로 확장됐음을 말해준다.
<바람이 분다>(감독 홍유정). 여성인권영화제 제공
폭력 교실에선 선생님이 권력자라고 한다. 그러나 직업 질서보다는 성별 권력이 앞서는 순간이 있다. <바람이 분다>는 보습학원에 출강하는 주인공이 자신이 학교를 그만두게 된 사건을 떠올린다는 이야기다. 남학교에서 완벽히 무시당하는 여자 교사의 이야기를 그린 <바람이 분다>는 폭력에 대한 한층 섬세해진 접근을 보여준다.
<전학생>에서 북한에서 온 수향은 계속 무언가를 연습한다. 새 학교에선 북한 억양을 지우고 자연스럽게 인사하기 위해서다. 고향 친구와 엄마의 지지를 받으며 학교에 갈 용기를 다진다. 남한 학생들과 똑같아 보이기 위한 모든 노력은 “북한에서 온 친구를 소개하겠다”는 남한 선생님의 한마디 말에 무너져버린다. 차별과 편가르기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나의 기념일>(감독 홍지수). 여성인권영화제 제공
<플라이>(감독 임연정). 여성인권영화제 제공
연대 이것을 연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의 기념일>에선 초등학교 때 어느 하루가 통째로 기억에 없는 여자아이가 나온다. 엄마는 다리에서 피를 흘리는 딸을 첫 생리라며 축하한다. 엄마는 정말 몰랐을까. 오랜 세월 서로가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모른 체하고 살아오던 엄마와 딸이 마침내 서로의 속을 보여주곤 제 갈 길을 간다.
본선 진출작 속 대부분의 여자들은 각자 살길을 도모한다. 숭고한 연대라는 구호는 지금 젊은 여성 작가들에겐 관념에 불과한 듯 보인다. <플라이>에서 편의점 사장한테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를 구해주려다 곤경에 빠진 주인공은 원망과 질투로 길을 잃는다. 알고 보니 사장과 사귀는 사이이고, 아르바이트로 꽃뱀까지 하는 친구는 구해줄 만한 삶이 못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악한 척하는 친구는 사실 어떤 관계에서도 실속을 챙기지 못한다. 주인공이 씩 웃으며 다시 친구들의 손을 잡는 장면은 십대 남자아이들의 성장과 우정 이야기의 미러링처럼 보인다. 성장담 속 주인공들이 여자아이들로 바뀌어 가고 있다.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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