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을 낸 배우 박정민.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배우 박정민을 예능 프로그램으로 보내야 한다. 박정민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은 글로 읽는 <라디오 스타>요, <해피투게더>다. 글도 이렇게 분주하고 웃긴데 사람은 또 얼마나 재밌을 것인가. 인터뷰를 앞두고 그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10월31일 서울 동교동 ‘한겨레 미디어카페 후’에서 만난 그는 예능 프로그램엔 절대 못 나간다며 수줍고도 조심스러웠다.
“누구나 처음 봤을 땐 저를 어려워해요. 착하게 생긴 얼굴도 아니고. 구석을 좋아하고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해서 제가 연기라는 직업을 찾은 거에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배우 박정민이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다. “정말로 저를 쳐다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내게 시선이 모이면 얼굴이 새빨개진다”고 여러번 강조하는 그와, 영화 <동주> 촬영 때 홀로 중국 용정에 있는 송몽규의 생가를 찾아가 화제가 됐던 열정적인 배우와, 책에서 “내 인생만큼은 내 위주로 편집된다”며 호기를 부리던 작가 중 누가 진짜 그일까?
책에서 그는 자신을 ‘찌질이류 갑’으로 소개하며 탈탈 턴다. 인터뷰에서도 성격 때문에 매번 오디션을 망쳤고, 캐스팅된 다음에도 배우들이 모여 대본을 읽는 시간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아 촬영장의 걱정거리가 되곤 한다는 등 자신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전 항상 이런 마음으로 글을 써요.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상황을 쓰는 거죠. 그런 상황이 무지 많아서 글감이 떨어지질 않아요.”
첫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을 낸 배우 박정민.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25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했지만 아직도 촬영장에 가기 전엔 식은땀을 흘린다. “대본 읽는 걸 못해요. 사람 눈을 보고 말을 던지면서 감정을 아는 게 연기인데 책에 꽂히는 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하면 무너지는 거예요. 리딩할 때면 단 한번도 빼놓지 않고 식은땀을 흘려요.” “배우의 ‘가오’는 나중에 뜨거든 차리겠다”는 그는 책에서 강박증 진단을 받은 이야기며 집 앞 공중화장실에서 대본 연습을 하다가 아동성범죄자로 몰릴 뻔한 일화 등 별별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다.
솔직함은 실제 박정민과 작가 박정민의 공통 요소다. “고구마를 심었는데 민들레가 나는 인생”들을 위로하고 “시급 5천원을 받고 일한다고 20대를 무시하지 말아라. 30대 때 더욱 빛나기 위해 지금 그 일을 한다”고 꽉 찬 소리를 하는 것은 작가 박정민이고, “저는 배우를 하면 안 되는 인간이죠. 그저 하고 싶다는 욕망과 치기 어린 마음, 뭐 같은 자존심으로 버티고 있는 거죠”라고 토로하는 것은 인간 박정민이다. 작가 박정민은 200자 원고지 20장 정도를 1시간이면 후딱 써버리는데, 배우 박정민은 대본을 받으면 틀리느니 아예 말을 안 해버리겠다는 심산으로 입을 꽉 다물고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수백번 연습하다가 뭘 좀 알겠다 싶으면 입을 연다. 배우 생활에서 상처 입은 감정들을 추스르기 위해 싸이월드, 수첩, 잡지 칼럼 등으로 쓰기 시작했던 글들이 모여 이렇게 박정민의 내면을 보여주는 책이 됐다.
첫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을 낸 배우 박정민.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애초 “어디 가서 연기를 배우려고 하는 게 창피해서” 고려대 인문학부에 일단 들어갔다가 3일 만에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입학하고 다시 연기과로 전과했다. 그런데 2011년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으로 데뷔하면서 배우 일이 끊이질 않았다. 그 뒤 <전설의 주먹> <들개> 등의 영화와 <너희들은 포위됐다> <사춘기 메들리> 등 드라마에서 소년과 청년 사이 아직 불완전한 캐릭터들을 맡았다. <동주> 송몽규 역으로 백상예술대상 남자신인연기상을 받았고 <티브이엔>에서 4일부터 시작한 드라마 <안투라지>에도 주연으로 출연하지만 박정민이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올해 말엔 연극을 해요. 제가 꼰대 기질이 있어서 배우라면 무대에서 걸어다닐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소속사 대표님이 ‘올해 말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려고 극장을 하나 빌려놨는데…’ 하시더라고요. ‘설마 제가 로미오는 아니겠죠?’ 했더니 푹 웃었어요.” 그리하여 12월 배우 문근영과 함께 무대에 오를 날을 앞두고 있다. ‘내 얼굴에 로맨스물이라니.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야….’ 여전히 비관적이지만 그가 책에 썼던 말을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당신 지금 아주 잘하고 계신 거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