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포카 혼타스>는 부족보다는 백인 남자를 구하는 일을 마치 평화를 위한 행동처럼 실천했다. 1998년 디즈니의 흥행작 <인어공주>의 에리얼은 왕자와 함께 있기 위해 불완전한 몸을 가진 인간이 되는 쪽을 택한다. <라푼젤>, <미녀와 야수>, <신데렐라>, <알라딘>…. 디즈니의 여자 캐릭터들은 한결같이 사랑을 위해 거리낌없이 자신의 세계를 버렸으며 디즈니는 여자에게만 연애가 곧 성장인양 가르쳐왔다. 남자 왕을 중심으로 한 디즈니의 견고한 왕국이 변화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해 여자 토끼 경찰을 주인공으로 한 <주토피아>에 이어 12일 개봉하는 <모아나>에서도 자신의 왕국을 만드는 새로운 여자 주인공이 나왔다.
남태평양 모투누이섬에 살고 있는 족장의 딸 모아나(목소리 연기 아우이 크라발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족장이 되기로 예정된 사람이다. 그런데 바다와 교감하면서 자신의 운명은 섬안에서 평화롭게 사는 게 아니라 저주로 죽어가는 섬을 구하러 먼길을 떠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아나는 바람과 바다의 신 마우이(드웨인 존슨)를 찾아 전설 속 저주를 풀기 위해 뗏목을 타고 암초 바깥 먼 바다로 나간다. 자신 안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아직 어린 그를 대신해 힘을 행사할 사람을 모은 뒤, 다수의 악당과 가장 강력한 적을 무찌른다는 이야기는 디즈니를 관통하는 성장담이다. 모아나는 <라이온 킹>의 심바, <정글북>의 모글리가 갔던 길을 따라간다. 그러나 유전자는 비슷할지 몰라도 주인공의 걸음에선 진화의 흔적이 묻어난다.
“왜 바다가 저를 선택했을까요?” 여러번 실패를 겪으면서 모아나는 이렇게 묻는데, 그 답은 예전 다른 영화들처럼 혈통이 좋거나 마음씨가 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모아나가 바다로 나가길 원하고, 모아나가 영웅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기존 디즈니 영화와 또 다른 점은 주인공을 돕는 조력자와의 관계다. 다른 조력자들은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교사고 아버지였다면 이번 영화에선 오히려 모아나가 반은 사람이고 반은 신인 마우이를 포기하지 않고 도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한다. 모아나에게 이러한 지혜를 전수한 사람은 할머니고, 그를 진실로 돕는 존재는 바다라는 이름의 대자연이다. 여성이 여성에게 길을 알려주고, 여성 주인공이 자연과 하나되는 길을 찾는 항해에 나서는 등 <모아나>가 캐릭터를 쌓아가는 방식은 기존 애니 속 다른 왕자와 공주에 대한 묘사와는 확연히 다르다. <모아나>를 만든 론 클레멘츠와 존 머스커 감독은 <알라딘>과 <인어공주>를 공동으로 만들었던 연출자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런 변화는 연출자들의 변화라기보다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디즈니의 정책적 변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투명한 바다와 그 안의 신기한 생물들, 남태평양 원주민에 대한 소묘 등 비주얼적인 진화도 눈에 띈다.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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