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른 길이 있다>에 정원과 수완 역으로 출연한 서예지, 김재욱을 18일 서울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조소영 한겨레TV 피디 azuri@hani.co.kr
19일 개봉한 조창호 감독의 <다른 길이 있다>는 두껍게 눈 덮인 고요하고 아름다운 화면 속에 동반자살이라는 격렬한 소재를 감추고 있는 문제작이다. 이 영화에서 김재욱·서예지는 각각 지옥 같은 일상을 감당하다가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수완과 정원 역을 맡았다. 위태롭고도 열정적인 걸음으로 그 길을 다녀온 두 배우를 18일 만났다.
김재욱은 “출연 제의를 받고서 조 감독의 전작 <폭풍전야>에 출연했던 배우 김남길에게 의논했더니 ‘그 형(조창호 감독)은 정말 아티스트야. 그리고 글이 죽여’ 그러더라”고 말했다. 시나리오가 배우들을 사로잡은 것은 확실하다. 서예지는 “완벽한 시나리오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우울함이나 아픔보다는 이야기의 완벽함에 홀렸다”고 출연 이유를 설명했다.
수완(김재욱)은 어릴 때 엄마의 죽음을 목격했으며 커서는 정신병원에 거짓 입원한 아버지의 병원비를 대야 한다. 이벤트 도우미로 일하며 전신마비인 엄마를 돌보는 정원(서예지)은 밤에는 아버지의 성폭행에 시달린다. 그들은 다른 길을 찾지 못한 채 자살 사이트에서 만나 동반 자살을 도모한다.
“명확했던 것은 시나리오뿐, 실제 촬영에 들어가니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어요.”(서예지) 영화에서 그들은 주로 온라인으로만 이야기를 나누고 6분 남짓한 시간만을 함께 있는데 그 시간을 촬영할 때 배우들은 더욱 흔들렸다. “둘이 만나는 장면을 찍을 땐 너무 화가 나서 가슴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어요. 뭔가 제시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감독님은 알아서 길을 찾는지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죠.”(김재욱)
배우들은 미혹에 빠진 현장에서 저돌적인 촬영을 감행했다고 한다. “정원이 차 안에 연탄불을 피우는 장면을 찍을 때 감독님이 드라이아이스가 아니라 정말 연탄을 피우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셔서 놀랐죠.” 서예지는 실제 연탄불을 피운 채 5분씩 8번을 촬영했다고 한다. 김재욱도 거들었다. “돌을 던져 자동차 유리를 깨뜨리는 장면을 찍기 전 얼핏 안에 사람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차 유리가 와장창 무너지는 바람에 가슴이 내려앉았죠. 사람이 다쳤을까봐. 그런데 아무도 없더라고요.” “배우를 실제 혼란에 빠트렸다가 탈출시키는 방식으로 감독님이 원하는 감정선을 이끌어냈던 것 같다”는 서예지의 이야기에 김재욱도 머리를 끄덕였다.
영화 <다른 길이 있다>에 정원과 수완 역으로 출연한 서예지, 김재욱과 18일 서울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조소영 <한겨레 티브이> 피디 azuri@hani.co.kr
<사도>의 정순왕후, 드라마 <화랑>의 숙명 역 등 사극으로 얼굴을 알렸던 서예지에게 <다른 길이 있다>는 첫 주연작이다. <커피프린스 1호점>의 꽃미남,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의 마성의 게이, <나쁜 남자>의 재벌 2세로 늘 동화 속 아름다운 초상화와도 같던 김재욱은 어느 순간부터 거친 독립영화 세계를 마구 달리고 있다. “저는 영화를 정말 정말 사랑하는 아이였는데 현실적으로 선택지가 별로 없어서 드라마만 했다. 제대하고부턴 내가 좋아하는 영화만 한다. 좀 가난해져도 설마 밥을 굶기야 하겠나.” 그는 <다른 길이 있다>를 통해서 영화 기획과, 제작, 투자를 모두 경험하며 “내가 좋아하는 자동차를 낱낱이 해부한 느낌”이라고 했다.
조 감독은 “수완 역만은 실제로도 착한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는데, 서예지는 “수완이 실제로 재욱 오빠랑 닮았다”고 했다. “이 영화는 자극적인 뉴스 속을 들여다본 듯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하는 서예지의 말투도 영화 속 정원을 닮았다.
연탄가스 장면을 두고 배우를 위험에 빠트린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커지자, 19일 서예지, 김재욱 두 배우는 <한겨레>에 “사전에 모든 위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리허설을 꼼꼼하게 거쳤다. 배우들이 제작진에게 의지와는 상관없이 휘둘리지 않았다”는 해명문을 보내왔다. 두 배우는 “배우가 모든 촬영의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고 자율적으로 동의한 것이 맞는지를 확인해달라”는 요청에 대해 “그렇다. 실제로 현장에서 리스크가 있는 촬영이 진행될 때엔 사전에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리허설을 꼼꼼하게 거쳤고, 배우들 역시 그 과정을 함께 하며 안전성을 확보한 상태에서 촬영이 진행됐기 때문에 지금의 논란이 안타깝다.
때론 연기와 실제의 경계를 나누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 그만큼 진심으로 작품에 임하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이라도 위험성이 있는 촬영은 거부한다고 해서 그 배우가, 그 스텝이 작품에 애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타자의 횡포다. 말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전하고자 했던 본질이 조금씩 그 형태가 바뀌는 것은 어쩔 수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코 이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배우들이 제작진이나 연출가에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휘둘리지 않았다는 것, 모두가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함께했고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다”고 답했다.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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