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플라이트 플랜
대륙과 대륙을 가로지르는 3천 피트 상공의 비행기는 인간의 주요 서식지 가운데, 가장 ‘21세기적’이다. 사실 그런 만큼 현대 사회의 모순과 갈등도 좁은 공간에서 가장 집약적으로 공포스럽게 불거질 수 있는데도 그간 ‘항공 스릴러’는 지상과 교신하지 않고선 영화다운 영화로 서지 못해왔다. <플라이트 플랜>의 매력은 공포의 실체가 오롯히 기체 내에서만 독립적으로 빚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좁은 사회(비행기 속)에서 옆에 누가 사는지(앉아 있는지)도 모를 만큼 서로가 무관심하다면? 단절된 공간에서 400명이 넘는 군중(승객) 가운데 애오라지 자신만 이유 불문하고 물리적, 정서적으로 고립된다면? 공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다. 자살한 남편 때문에 황망해진 여인, 프랫 카일(조디 포스터)이 잠시 눈을 붙인 사이 딸, 줄리아가 사라진다. 베를린에서 외가가 있는 미국으로 향하던 점보 비행기 안. 카일의 주장대로 딸이 납치된 건지, 상실감 큰 여인의 망상일 뿐인지, 도대체 딸이 비행기에 타기나 했는지조차 러닝타임 3분의 2를 넘어설 때까지 영화는 감춘다. 줄리아를 찾겠다는 카일의 집착에 가까울 만큼의 모성애와, 소동이 커질수록 무관심해지고 냉대하는 승객들의 군중 심리가 맞서지만, 대결이 될 리 없다. 도대체 줄리아를 봤다는 승객이 없고, 탑승자 명단에도 줄리아는 없다. 심지어 딸은 이미 죽었다는 병원 전갈까지 왔으니, 카일이 악을 쓸수록 승객들은 모두 카일의 정신 착란을 확신하게 되고, 관객도 살짝 그 편에 올라탄다. 제한된 여건의 밀도 높은 공포에 맞서서 한 인간이 초인적 능력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조디 포스터가 바로 이전 출연했던 <패닉 룸>이나 한편으론 <롤라 런> <나이트 플라이트>과 겹쳐보인다. 다들 정서·구조적으로 닮아있는데, 다만 이번에는 ‘조디 포스터 1인극’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영화가 전개되는 힘이 단연 그로부터 나온다. 나름 치밀하나 대단히 비현실적인 음모가 전면에 드러나고 카일이 범인과 지능 대결은 물론 육박전까지 벌이는 대목부터 사실 긴장감이 흩어진다. 무엇보다 관객조차 승객의 일부인 양 내몰았던, 감독의 수완이 한번에 힘을 잃는다. 카메라를 따라 한때 아랍인을 의심했던, 카일을 추궁했던, 현대인(관객이든 승객이든)의 그 섬뜩한 눈길들을 일순 안도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애초 시나리오는 카일 역으로 남자배우인 숀 빈(기장 역)을 염두에 둔 채 쓰여졌다. <타투>(2002년)로 데뷔한 독일 감독 로베르트 슈벤트케는 생각했는지 모른다. 안전벨트 사인은 안중에 없이 객석에서 화물칸까지 종횡으로 넘나들려면, 웨슬리 스나입스같은 근육질 남성배우의 액션이 아닌 바에야 아이 잃은 엄마의 절절한 모성애 정도는 되어야 동기 부여되는 게 아니냐고. 11일 개봉.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부에나비스타 인터내셔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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