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손현주는 항상 누군가의 남편이거나 아비였다. 그는 동시에 1980년대의 자식이다. 23일 개봉하는 영화 <보통사람>(감독 김봉한)은 그의 가족관계도와 혈통을 드러내는 영화다.
“80년대 아버지가 2017년도 아버지와 다른 점이 있을까. 그 마음을 드러내면 어떨까.” 15일 언론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기자들에게 되물었다. 시사회 다음날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그는 “투자받기도 힘들고 제작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던 영화”라고 험난했던 제작 과정을 언뜻 설명하면서도 “그래도 <보통사람>은 아내와 아들을 위해 끝까지 달리려고 했던 사람의 이야기로 보아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원래 이 영화는 1975년 전국을 돌며 17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 김대두 이야기를 모티브로 기획됐다. 시국사건을 덮기 위해 살인사건 수사를 기획했던 1970년대 남산 안기부 시절의 이야기는 <공작>이라는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질 뻔했지만 개봉을 위해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의 이야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바뀐 배경에 대해 제작진은 말을 아끼지만, 영화가 제작될 당시엔 유신정권을 잇는 대통령에 그때의 안기부 실장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상황이라 개봉을 고려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봉한 감독은 여러 차례 “이 영화는 손현주씨 덕으로 나온 영화”라고 했는데, 안기부 실장 역을 맡은 장혁, 아내 역 라미란 등 많은 배우들이 손현주와의 인연, 그에 대한 신뢰로 영화에 참여했다. “장혁씨와는 에스비에스 드라마 <타짜> 때 만나서 언젠가 꼭 다시 해보자고 했는데 이번에 흔쾌히 응해줬어요. 아마 무슨 역할인 줄도 모르고 왔을걸요. 하하. 라미란씨도 다른 현장에서 몇번 봤는데 이번에 이런 영화를 한다고 했는데 선뜻 오더라고요. 그 사람도 무슨 역할인지 묻지도 않았어요.” 배우 손현주는 관객들에게만 ‘믿고 보는 배우’가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그렇다.
영화 <보통사람>에서 그는 국가에 충성하고 가족들을 챙기는 것이 행복이라 믿는 1980년대의 아버지를 연기한다. 오퍼스픽쳐스 제공
<보통사람>에서 그는 월남전 참전 경력이 훈장인 강력계 형사로 열심히 범인들을 ‘때려’ 잡고 듣지 못하는 아내와 다리가 불편한 아들을 언젠가는 번듯한 집에서 살게 해주고 싶다는 소망으로 산다. 그런데 안기부 공작에 참여하게 되면서 과연 그의 소망은 옳았던 것인지 시험대에 오른다. “영화 속 판잣집에서 라미란씨에게 ‘이뻐’라고 할 때 가슴이 아팠어요. 너무 눈물을 많이 흘려서 여러 번 다시 찍었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정말 라미란씨가 가슴이 미어지도록 예뻤고, 가장의 심정으로 미안했고, 자신의 양심을 여러 번 돌아봤다”고 했다.
실제 그 시절에 무엇을 했느냐고 묻자 “항상 하얀 연기로 가득한 학교를 다니면서 정극을 배웠고, 그 와중에 노동해방극을 하겠다는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하다가 “그 시대를 어떻게 한 시간 인터뷰에서 요약하겠느냐”며 말을 아낀다. 그러면서도 당시에 흥하던 종로 디스코텍의 엔딩송까지 줄줄이 읊는 걸 보면 그게 다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좀 놀았고, 많이 분노했고, 늘 갈등했던” 1980년대의 손현주는 이제 그 시절의 아비를 연기한다. 그 경험들은 손현주의 막춤과 긴장과 눈물들로 영화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연기를 잘하더라고요. 그 사람 인생의 굳은살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제 굳은살이 뭐냐면… 손현주라는 사람의 존재감이 생긴 지가 얼마 안 돼잖아요. 1991년 데뷔해 감독님들도 제 이름을 모르니까 오랫동안 ‘어이’나 ‘야, 너’라고만 불렸죠. 한 회차에서 잘 못하면 드라마에서 아예 빠지는 경험을 수도 없이 했고요. 이런 사람이 끝까지 남아 있다면 그 힘은 진정에 가까운 힘이라고 믿어요. 앞으로도 그 힘으로 갈 거예요.”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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