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전거에 대하여>.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영화 표현의 해방구.” 4월27일부터 10일간 열리는 18회 전주국제영화제가 내건 슬로건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프로그램의 자유를 훼손한 일이 없다는 영화제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말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예술적 표현에 어떠한 제약도 두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28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상영작 발표 기자회견에서 영화제 조직위원장인 김승수 전주시장은 “17년 동안 관객과 영화인에겐 겸손했지만 자본과 권력엔 당당했다. 영화 표현의 드넓은 광장이자 촛불이 될 수 있도록 울타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대담하고 논쟁적인 작품의 향연으로 영화제를 자리매김하겠다는 주최 쪽의 의지는 단연 ‘다큐멘터리의 강세’로 드러나고 있다. 58개국 229편의 작품이 상영되는 이번 전주영화제의 특징을 다큐의 흐름을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 뜨거운 다큐들 ‘장미 대선’ 직전 열리는 이번 영화제는 정치 다큐멘터리로 뜨겁다. 그중에서도 단연 기대를 모으는 작품은 <엔(N) 프로젝트>다. 2002년 정당 최초로 열린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다큐 내용은 상당 부분 아직 비밀에 부쳐져 있다. 지금 더불어민주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국민참여경선의 시작이며 처음으로 정치인들이 팬덤을 형성하던 시기다. 이때 지지율 2%대의 꼴찌 후보 노무현이 출사표를 던져 대통령에 당선된다. 2006년과 2013년 <사이에서>와 <길 위에서>로 각각 그해 한국 다큐 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던 이창재 감독이 만들었다. 이 영화를 미리 본 마케팅 관계자들은 “웃음과 눈물의 강력한 드라마”라는 평을 내놓고 있다.
‘박사모’ 안쪽을 깊숙이 들여다본 김재환 감독의 <미스 프레지던트>도 화제작이다. 카메라는 아침에 박정희 대통령 영정에 참배하고 버스를 타고 상경해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노인들에게 밀착해 대화를 시도한다. 박정희는 어떻게 신화가 됐으며 유신은 어떻게 종교가 됐는지, 개발시대 이념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다.
언론과 방송이 이념의 잣대로 통제되던 지난 정권, 다큐는 방송 시사프로그램이 하지 못했던 질문을 대신 해왔다. ‘왜 21세기에 우리는 단일한 역사이념을 강요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출발하는 <국정교과서>는 언론이 진작에 했어야 할 논쟁을 제기한다. <천안함 프로젝트>를 만들었던 백승우 감독은 역사학자들의 입을 통해 독일, 일본, 영국 등에서 있었던 역사 논쟁을 자세히 듣고 자신의 세계관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가진 자들의 세계관으로 살 것인가를 관객에게 되묻는다.
<나의 자전거에 대하여>(감독 박동현)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지점인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자신의 경험과 연관해 풀어낸다. 그런 역사적 사건들이 만들어낸 갈등과 분열, 배제와 배척이 어떻게 ‘나’라는 개인에게 다가왔는가를 살피는 것이 우리가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이유다.
■ 개인에 주목하는 생활영화들 일상의 문제를 다기한 시선으로 풀어나가는 생활 다큐들도 만만치 않다. <비(B)급 며느리>(감독 선호빈)는 결혼 3년차 감독이 어머니 때문에 부인과 부부싸움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고부 갈등과 결혼에 얽힌 문제들을 제기한다. 선 감독은 “서로 입장이 엇갈리니까 증거를 남기자는 의견에서 영상을 찍었다가 영화로 만들게 됐다”고 했다. <버블 패밀리>(감독 마민지)는 건설업에 종사하며 중산층으로 살던 부모님이 1997년 금융위기를 겪는 모습을 통해 개발경제의 허망함을 드러낸다. 박문칠 감독 <파란나비효과>는 개인사 다큐는 아니지만 경북 성주에서 벌어진 사드 반대운동을 따라가되 단순히 시위대의 겉을 훑는 것이 아니라 여기 참여한 평범한 젊은 엄마들에게 밀착한다. 이를 통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개·폐막작도 눈길 개막작에는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몸과 영혼>이 선정됐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연극영화학교 교수인 일디코 에네디 감독이 18년 만에 발표한 작품으로, 몸은 자랐지만 미숙해 보이는 마리아와 세상의 권태로움을 짊어진 듯한 내면을 지닌 남자의 소통을 그렸다. 폐막작은 <워터 보이즈> <스윙걸즈> 등을 만든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서바이벌 패밀리>가 상영된다. 지난 2월 일본 개봉작으로, 도쿄의 갑작스런 전기공급 중단으로 혼란에 빠진 가족의 이야기를 담았다.
‘국제경쟁’ 부문에는 10편이 출품됐으며, <클럽 로셸>, <인 비트윈>, <소피아의 아들>, <경계 위의 세 여자>, <닿을 수 없는> 등 다섯 편이 여성감독의 작품이다. 한국 사회의 불안과 강박을 조롱하는 펑크 밴드 ‘밤섬해적단’을 조명하는 정윤석 감독의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도 ‘국제경쟁’에 초청받았다.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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