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더우먼>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원더우먼이 돌아왔다. 영화에서는 ‘인간 구원’의 사명을 띠고 전쟁의 한복판으로 걸어 나왔지만, 현실에서 원더우먼이 걸머진 운명은 침체에 빠진 ‘디시(DC) 코믹스의 부활’이다. ‘아프로디테만큼 아름답고, 아테나에 버금가게 지혜로운데다, 헤라클레스를 능가하는 힘을 가졌으며, 헤르메스보다 빠른’ 여성 영웅은 과연 강렬한 액션과 화려한 볼거리를 무기로 디시의 구원투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원더우먼은 1941년 디시 코믹스 만화책에 처음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근육질 남성 영웅으로 가득한 코믹스 세계관 안에서 부수적 존재에 불과했던 여성 캐릭터가 전면에 등장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런 초유의 캐릭터를 단독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무려 76년 만에 개봉한다는 소식에 전세계의 이목이 쏠린 것은 당연하다.
영화 <원더우먼>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원더우먼>은 원작 만화 속 설정을 대부분 차용한다. 다만 원작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의 대결을 그렸다면, 이번 영화는 1차 세계대전으로 시대 배경을 옮겼다. 아마존 전사의 왕국 데미스키라에서 자란 공주 다이애나(갈 가도트)는 세상을 지키는 전사를 꿈꾼다. 딸인 다이애나를 걱정하는 여왕 히폴리타는 이에 반대하지만, 결국 다이애나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훈련을 허락한다. 어느 날 다이애나는 데미스키라에 불시착한 조종사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를 만나게 되고, 평화로운 데미스키라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1차 대전의 혼돈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선한 인간들이 전쟁의 신 아레스의 꾐에 빠져 서로를 공격한다고 믿는 다이애나는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트레버 대위 일행을 도와 전쟁에 참여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감을 깨닫고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세계 영화 시장을 장악한 마블과 한때 쌍벽을 이뤘던 디시는 사실 최근 들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디시의 대표 영웅인 배트맨과 슈퍼맨의 대결을 그린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과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지난해 잇달아 개봉했지만, 두 영화 모두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기며 체면을 구겼다. 평단과 관객의 혹평은 덤으로 얹혔다. 다만 <배트맨 대 슈퍼맨>에 등장한 원더우먼만이 존재감을 뽐내며 “이 영화의 진정한 승자는 원더우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원더우먼>에 호기심 어린 눈길이 쏠린 또 하나의 이유다.
영화 <원더우먼>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뚜껑을 연 <원더우먼>은 일단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무엇보다 원더우먼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깨달아가는 여정이 다소 뻔하지만 큰 무리 없이 자연스레 흘러간다. 가이아의 황금 거들로 만든 ‘진실의 올가미’, 총알도 막아내는 ‘승리의 팔찌’, 제우스가 남겨뒀다는 검 ‘갓 킬러’ 등 원더우먼의 독특한 무기를 활용한 화려한 액션은 신선하다. 데미스키라의 모습을 구현하려고 47개국 로케이션을 검토한 끝에 찾아냈다는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의 아름다운 모습, 1918년의 런던을 완벽하게 재현해낸 디테일한 미장센도 눈을 사로잡는다. 방패를 디딤돌로 삼는 화려한 공중돌기, 말에 거꾸로 매달린 채 뽐내는 활 솜씨 등 아마존 전사의 훈련 모습도 감탄을 자아낸다.
<원더우먼>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여성 감독 패티 젱킨스의 연출력이다. 전세계 팬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원더우먼은 티브이(TV) 시리즈 속 모습이다. 1976년 성조기를 본뜬 빨강과 파랑의 원색 전투복을 입고 진실의 올가미를 휘두르며 브라운관을 휘어잡은 린다 카터는 “만화와 싱크로율 100%”라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육감적 가슴과 호리병처럼 날씬한 몸매 등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성 상품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원더우먼은 남성 악당을 압도하는 ‘페미니즘의 아이콘’이자 ‘여성 성 상품화의 대명사’라는 이중적 이미지가 덧씌워진 존재인 셈이다.
영화 <원더우먼>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젱킨스 감독은 여성에겐 투표권조차 없었던 1918년을 배경으로 용감하고 당당하며, 심지어 우아하기까지 한 원더우먼을 그려낸다. 다이애나가 런던의 백화점에서 여성의 코르셋을 보고 “이곳 여자들의 갑옷이냐”고 묻는 장면이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의미심장한 이유다. 젱킨스 감독은 영화 잡지 <엠파이어>와 한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여성 히어로 영화가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에 대해 “뭔가 달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원더우먼이 다른 슈퍼히어로와 다를 게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화 속 원더우먼은 비록 여전히 헐벗은 갑옷을 입고 있지만, 감독의 장담대로 배트맨·슈퍼맨과 다름없이 자신의 존재를 고뇌하고 회의하는 ‘인간적인 영웅’의 면모를 보여준다.
올해 11월엔 배트맨, 슈퍼맨, 아쿠아맨, 플래시, 사이보그 그리고 원더우먼 등 디시의 영웅이 총출동하는 <저스티스 리그>가 대기하고 있다. <원더우먼>의 흥행 여부는 결국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맞서는 ‘디시 익스텐디드 유니버스’ 성공의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31일 개봉.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