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연극에 출연하는 스타 배우들이 부쩍 늘고 있다. 왼쪽부터 유지태, 김갑수, 유오성, 문성근.
연극판에서 배우 키워두면 영화판에서 낼름 채간다
영황배우가 연극하면 뉴스가 된다 외국서는 흔하다 흔한 일인데…
중견배우 기근인 연극계는 항변한다 “배우만 뽑지말고 제작 참여해달라”
<대부 1>에 출연한 알 파치노의 개런티는 50만달러. 말론 브란도가 받은 100만달러의 절반이었다. 알 파치노는 말론 브란도와 같은 금액을 요구했다가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연극배우였지만, 영화배우로서는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 2>를 찍을 때는 사정이 달라졌다. 제작사쪽이 말론 브란도와 같은 100만달러를 주겠다고 했지만 알 파치노는 한 술 더 떴다. 200만달러를 요구한 것이다. “너희들은 연극계 최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나는 치욕을 참고 견뎠다. 그러니 말론 브란도의 두배를 달라.” 결국 제작사쪽은 알 파치노의 ‘강짜’에 굴복하고 말았다. 연극계와 영화계의 자존심 싸움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외국의 경우 유명 배우들이 연극과 영화를 오가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알 파치노는 영화계의 대스타가 된 이후에도 꾸준히 연극에 출연하고 있다. 연극을 제작하기도 한다. 더스틴 호프만이 ‘샤일록’으로 출연하는 <베니스의 상인>은 런던에서 관객이 가장 많이 드는 인기 연극이다. 제레미 아이언스나 존 말코비치도 연극과 영화에 절반씩 출연한다. 뉴욕 뒷골목의 실험극장인 ‘라마마극장’ 출신인 로버트 드니로는 재정난으로 문닫을 위기에 처한 이 극장에 100만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배우뿐 아니라, 작가와 연출가까지 모두 자유롭게 넘나든다. 우리나라의 경우 충무로와 대학로 사이에는 ‘레테의 강’ 같은 심연이 존재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둘 사이를 넘나드는 사례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연극배우 출신인 설경구, 유오성, 권해효 등 최형인 한양대 연극영화과 교수 사단(극단 한양레퍼토리)뿐 아니라, 유지태나 조민기처럼 연극과는 인연이 없던 배우들도 연극에 열정을 보이고 있다. 연극 <칠수와 만수>로 유명한 문성근도 10년만에 다시 무대에 선다. 김갑수는 ‘극단 배우세상’을 만들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서 스타 배우들의 연극 출연은 그 자체로 ‘기사’가 된다.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라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나 연극배우 출신 배우가 다시 연극한다고 대서특필하지, 다른 나라에서는 흔한 일이에요. 연극 출연은 배우 자신을 위한 투자거든요.”(최형인 교수)
장면마다 잘라서 찍고 편집하는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면, 연극은 배우의 느낌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나는 ‘배우의 예술’이다. 연극 무대에 서는 것은 재충전이기도하고 재교육이기도 하다. 관객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덤’이다. 외국의 ‘한다 하는’ 배우들이 연극에 열심인 까닭이다.
“연극과 영화는 숨 쉬는 것부터 달라요. 영화는 카메라가 멀리서 가까이로 치고 들어가잖아요. 배우는 그냥 일상적인 연기를 하면 되죠. 하지만 연극은 카메라가 먼 곳에 고정돼 있는 셈이죠. 배우가 자기 숨으로 카메라를 당겼다 놓았다, 무대를 채웠다 비웠다 해야 하는 거예요.”(이윤택 국립극단 예술감독) 이렇게 훈련받은 연극 배우 출신들은 연기의 폭이 넓고, 변신이 쉽다. 반면 일상적인 연기만 거듭해온 영화배우나 탤런트들은 ‘맨날 똑 같은 연기만 한다’는 평을 듣기 십상이다. 영화쪽이 연극배우들의 이런 장점을 알아채고 본격적으로 스카웃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 이후 영화판에 돈이 몰리고, ‘파이’가 커지면서 대학로는 충무로의 ‘인력 사관학교’로 전락했다. “대학로의 능력있는 배우들은 거의 ‘박멸 상태’”라는 탄식이 나오고 있다. 한창 연습을 하다 영화 섭외가 들어왔다고 내팽개치고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국내 최고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한 극단의 배우 평균 나이는 30살. 인생과 연기를 알만 한 나이가 되면 영화쪽이 다 낚아채 버리기 때문이다. “연극계에서 ‘쎄가 빠지게’ 배우를 키워놓으면 영화가 낼름 뽑아가고, 이를 다시 텔레비전 드라마가 받아먹는 형국”이다. 젊은 배우들 사이에선 연극을 영화로 가기 위한 발판으로 인식하는 분위기마저 짙다. 연극계의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연극이라는 게 10대부터 80대까지 골고루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머리를 하얗게 칠하고 나와요. 특히 30~40대 중견배우의 기근현상은 심각한 상태죠.”(연극평론가 노이정) 대학로쪽에서 충무로쪽에 제시하는 대안은 곶감 빼먹듯 배우만 뽑아가지 말고 연극 제작에 참여해달라는 것이다. 유명 배우의 경우 일정한 개런티를 받되, 나머지는 흥행성공 여부에 따라 수익을 나누거나, 지분을 투자하는 방식으로 제작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것. 매니저 혹은 기획사들이 연극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배우가 재충전을 하려고 연극을 하고 싶어해도, 매니저들이 “몸값 떨어진다”며 말린다는 것이다. 연극계도 스타 배우들의 ‘얼굴’을 세워줄 수 있는 작품을 생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지금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역할을 맡기거나, 연습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대에 오르게 하는 관행으로는 스타 배우들의 망설임만을 키울 뿐이다. “저는 애초에 영화배우, 연극배우가 따로 없다고 생각해요. 자유롭게 왕래해야죠. 하지만 당장 편하다고 배우만 뽑아다 쓰면 연극계는 고갈되고 말겁니다. 연기예술의 기초인 연극과 상업예술인 영화가 같이 살 길을 찾아야죠.”(이윤택) 최근 설경구가 출연한 연극 <러브레터>는 복도에 까지 관객들이 가득 들어찼다. 양동근의 <관객모독>도 연극으로서는 드문 흥행 성적을 거뒀다. 이런 성공사례들이 하나 둘 쌓이면, 대학로와 충무로는 (오프)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처럼 상생할 수 있을까? 스타 배우들의 얼굴을 대학로에서 예사로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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