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집단 ‘광화문시네마’ 멤버들은 대학시절부터 함께 보낸 시간이 긴 만큼 쿵짝이 딱딱 맞아떨어진다. 진담인 듯 농담인 듯 오가는 ‘핀잔’ 속에 서로에 대한 애정이 물씬 풍겨나온다. 22일 개봉을 앞둔 <소공녀>를 만든 전고운 감독은 “지금까지 4편의 영화가 모두 무사히 완성되고 평가도 좋은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며 웃었다. 왼쪽부터 김태곤, 권오광, 이요섭, 김지훈(사다리에 서있는 이), 전고운, 우문기.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광화문에서 불어온 ‘미풍’이 결국 충무로에 ‘돌풍’을 일으켰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이 현실화됐달까. 자유로움과 재기발랄함으로 영화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킨 젊은 창작집단 ‘광화문시네마’가 네 번째 작품 <소공녀>(전고운)로 다시 관객을 찾았다. <1999, 면회>(2013·김태곤), <족구왕>(2014·우문기), <범죄의 여왕>(2016·이요섭)까지 매 작품 관객과 평단의 환호를 받았던 광화문시네마의 독보적 경쟁력은 ‘믿고 봐도 좋은’ 레이블(상표)로 자리를 굳혔다. 이제 ‘제2기’를 꿈꾸며 도약을 준비 중인 광화문시네마의 김태곤(38), 이요섭(36), 권오광(35), 우문기(35), 전고운(33) 감독과 김지훈(39) 프로듀서를 14일 씨지브이(CGV) 명동역 라이브러리에서 마주했다.
‘광화문시네마’의 첫 작품 <1999, 면회>(2013).
■ “여전히 우리는 생산적 동아리 활동 중”
“시작은 술자리”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동기인 5인은 김태곤 감독이 구상 중인<1999, 면회>에 대해 이야기하다, “까짓것, 십시일반으로 만들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김 감독의 대학 동창으로 상업영화를 하던 김지훈 프로듀서가 가세했다. “예산이 1000만원뿐이라 몸으로 때워야 했어요. 그때 서로의 스태프가 돼 주는 품앗이 제작방식이 탄생한 거죠. 전 감독 ‘서식지’인 광화문에서 주로 작업을 해서 이름을 ‘광화문시네마’로 정했어요. ‘장충동 족발’, ‘평양 냉면’, ‘마산 아귀찜’과 비슷한 작명이죠.”(김태곤)
<면회>의 감독이었던 김태곤과 제작을 담당했던 전고운이 대표를 맡았다. ‘대표는 뭘 하냐’고 물었다. “세금 관련 잡무를 주로 처리하죠. 허드렛일도 하고요. 푸하하.” (김태곤) “전 사무실 월세를 수금해요. 돈 내라고 재촉하는 것이 제일 큰 임무죠.”(전고운)
술자리서 영화 얘기하다
“까짓것 십시일반 찍자” 의기투합
기존에 없던 캐릭터·스토리로
‘성공한 독립영화사’ 이름 얻고
상업영화 진출 발판 만들었다
돈벌이가 목적은 아니지만
‘배급’ 문제 해결은 여전한 숙제
직원도 없고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니, 월세는 6등분 해 공평하게 부담한다. “우리는 (광화문시네마를) 생산적 동아리 활동이라 불러요. 놀면서 이야기하다 아이디어도 나오고, ‘저요’라며 손 먼저 든 사람 순서로 작업에 들어가죠.”(김지훈) “돈 벌려는 회사가 아녜요. 그러니 동아리 회비(월세)를 내야죠.”(우문기) 놀이 같은 동아리 활동의 생산력은 무지막지해서 만 4년 동안 네 작품이 탄생했다. 1년에 한 편꼴이다.
“사실 이 시스템의 혜택은 제가 제일 많이 봤어요. 첫 영화다 보니 처음엔 제작, 각색, 프로듀싱, 자문, 섭외 등등 전부 나눠 맡았는데, 점점 다들 바빠지니 고운이 <소공녀> 할 때는 많이 못 도왔네요.”(김태곤) “대신 저는 ‘광화문시네마’ 레이블의 덕을 가장 많이 봤죠. 그리고 오빠들은 제게 우산 같은 존재였어요. 촬영 내내.”(김고운) 힘겨워 돌아보면 언제 왔는지 멤버들이 ‘전고운 친위대’처럼 쭉 지켜보고 서 있더란다.
‘광화문시네마’의 이름을 알린 <족구왕>(2014).
■ 쿠키영상과 배우 중복 출연으로 인장을 찍다
광화문시네마의 가장 큰 특징은 ‘쿠키 영상’이다. <면회> 마지막에 <족구왕> 쿠키 영상을 넣은 것이 온라인에서 ‘파란’을 일으켰다. <족구왕>에는 <범죄의 여왕>, <범죄의 여왕>에는 <소공녀>의 쿠키 영상이 삽입됐다. 이번에도 <소공녀>에 <강시>의 쿠키 영상을 넣었다. “흥미를 돋우는 차원이기도 하고, 광화문시네마 작품이라는 표식이기도 해요. 물론 다음 작품에 대한 막연한 약속 같은 것이기도 하죠.”(김지훈) <강시>는 차례로만 따지면 권오광 감독의 영화가 될 터다. 권 감독은 “술 먹고 태곤이 형이랑 누워있다 ‘그 많던 강시는 다 어디로 갔을까?’라는 의문을 던진 게 시작이었다”며 영화가 언제쯤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했다.
화제를 불러온 만큼 쿠키 영상이 투자나 배급에도 도움이 됐을까? “무슨 소리! 투자는 냉정해요. 절대 그런 사소한 것에 투자자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하하. 관객에게 인지도 높이는 데는 엄청 유용했지만요.”(김지훈)
또 하나의 특징은 ‘배우의 중복 출연’이다. <족구왕> 안재홍이 <범죄의 여왕> 카메오로, <소공녀>의 주연으로 계속 등장하는 식이다. <범죄의 여왕> 박지영 역시 <소공녀>에 깜짝 출연한다. “(안면을 텄으니) 일단 부탁하기 편하죠. 하하하. 배우들도 광화문시네마에 어떤 흔적을 계속 남기고 싶어해요. 경쟁심도 있나 봐요. ‘넌 세 편 나왔냐? 난 네 편 나왔다’ 이런 식으로.”(우문기) 안재홍·황미영·최재현이 ‘4관왕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배우란다. “상업영화에 여배우가 도드라지는 작품이 적다 보니 배우들도 목마름을 느끼는 듯해요. 상업영화에 없는 캐릭터와 스토리가 우리 영화엔 있으니까. 이솜씨나 (박)지영 선배가 대표적으로 그렇죠.”(전고운)
사실 더 중요한 이유는 ‘의리’다. “의리 때문에 <소공녀>에 선뜻 출연한 재홍이는 ‘형, 잠깐 나온다더니, 나 벌써 8회차 찍고 있어’라고 전화를 했더라고요. 고운이한테 불평하라니 ‘무섭다’며 참더군요. 으하하”(권오광)
광화문시네마의 세번째 작품 <범죄의 여왕>(2016).
■ 제2기 광화문시네마를 고민하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대안’으로 불린 광화문시네마지만, 지난 4년은 현실의 높은 벽을 절감한 시간이기도 했다. 독립영화가 한 해 수백편씩 쏟아져 나오지만, 시장의 파이는 커지지 않았다. 독립영화 전용관이 적으니 ‘배급’은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광화문시네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관객이 편한 시간대에, 집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도록 전용관을 늘려야 해요. 상업논리로 안 된다면 정부가 나서야죠.”(김태곤)
남들 눈엔 ‘성공한 독립영화 제작사’인 광화문시네마의 고민도 많아졌다. “<족구왕> 예산이 1억, <범죄의 여왕>은 4억, <소공녀>도 3.5억이나 돼요. 겉으론 예산이 커진 듯 보이지만 실제론 아니에요. 배우·스태프의 열정페이를 조금이나마 개선하려니 투자를 더 받아 예산을 키워야만 했어요. 이런 시스템은 앞으로도 우리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어요.”(이요섭) “<소공녀>가 잘 돼 제발 사무실을 월세에서 전세로 옮길 수 있으면 좋겠네요.”(전고운) “광화문시네마 2기는 월세에서 전세시대로? 으하하.”(권오광)
어찌 됐든, 광화문시네마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독립영화 틀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업영화까지 종횡무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냈다. 권오광 감독은 <돌연변이>(2015)에 이어 올해 <타짜3> 촬영에 들어간다. 앞서 상업영화 데뷔작 <굿바이 싱글>(2016)로 210만을 동원한 김태곤 감독도 덱스터스튜디오와 함께 재난영화 <사일런스>를 준비 중이다. 우문기 감독 역시 덱스터와 “스포츠로 무협을 하는 하이브리드 장르”인 <배드민권>을 진행 중이다. “독립영화에서 상업영화로 건너가기 쉽지 않은 현실을 고려하면 광화문의 힘이 컸다는 걸 부인할 수 없겠죠. 그래도 맘 고생은 남들 못지 않았어요. 눈물로 베갯잇을 적신 생각을 하면…. 하하하.”(우문기)
22일 개봉을 앞둔 광화문시네마의 네번째 작품 <소공녀>.
4년 동안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무엇일까? “네 편의 영화와 팬들이죠. 더불어 네 편 모두 손익분기점은 넘겼다는 것? 제2기를 말하는 이유기도 해요.”(김태곤) “나 빼고 모두 결혼하고 아이도 낳은 게 제일 큰 소득 아냐? 으하하.” 권오광 감독이 ‘광화문시네마 커플’로 부부가 된 전고운 감독과 이요섭 감독에게 시선을 던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돈을 벌기 위한 회사가 아니기에 규모를 키울 생각은 없단다. 그럼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영화 이야기를 하러 모일 수 있는 곳, 아이디어가 샘 솟으면 언제든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곳으로 남았으면 해요. 늘 발전적 해체를 말했지만, 사실 영화를 하는 한 해체는 없을 것 같아요.”(김태곤) “다 함께 드라마나 영화를 찍고픈 꿈이 있어요. 영국 드라마 <블랙미러>처럼 하나하나가 독립된 에피소드면서 연결고리가 있는. 바통을 이어받는 릴레이 드라마나 옴니버스 영화도 좋고요. 아, 일단 오광 오빠의 <강시> 먼저? 하하하.”(전고운)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미소’ 띈 N포세대, 포기하니 자유롭다
광화문시네마 네번째 작품 <소공녀>는 어떤 영화?
가사도우미 일당 4만5천원으로 약, 월세, 식비, 위스키, 담뱃값까지 쪼개어 살고, 앞날이 캄캄하지만 낙천적인 한솔(안재홍)과 ‘극빈한 연애’를 하는 미소(이솜). 남들이 뭐라든 미소는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그러나 “모든 게 오르고, 내리는 건 비뿐”인 시대다. 어느 날 월세 5만원, 담뱃값도 2천원이나 오르는 ‘고난’이 닥쳐온다. ‘과연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위스키? 담배?’ 아니, 미소는 과감히 ‘집’을 버린다. 그리고 과거 밴드를 함께 했던 친구들의 집을 하나씩 찾아 나선다.
전고운 감독은 “<소공녀>는 성장담이 아닌 여행담”이라고 설명했다. 방황을 통해 깨닫고 한 뼘 자란다는 흔한 성장담이 아닌, 친구를 찾아 이집 저집 오가며 겪는 여행담. 미소도 말한다. “난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라고.
친구들의 삶도 녹록지는 않다. 틈틈이 수액을 맞으며 대기업에서 일하는 친구, 시부모를 모시며 수험생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친구, 아내의 요구에 빚을 내 아파트를 샀지만 결국 이혼당한 친구, 남편 덕에 저택에 살지만 눈치꾸러기가 된 친구….
친구들에겐 ‘포기하지 않아 위태로운 안온함’이 있지만, 미소에게는 ‘포기함으로써 지켜낸 자유와 확실한 취향’이 있다. 위스키와 담배를 즐기는 미소에게 그들은 “염치없다”고 하지만, 사실 미소는 누구보다 건강하고 자립적이다. 친구들의 위태로운 삶을 엿본 미소는 가사도우미 실력을 발휘해 따뜻한 밥 한 끼를 해주고 반들반들하게 집안을 청소해준다. 그뿐이다. 자기연민 따윈 없는 미소이기에 남의 삶에 대한 어설픈 위로는 더더욱 없다.
영화는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는다. 미소와 한솔이 한기 가득한 방에서 사랑을 나누려다 “봄이 되면 하자”며 체념하는 장면, 데이트용 영화 티켓을 구하기 위해 헌혈을 하는 장면 등에선 N포세대의 실태를 녹여낸 빼어난 블랙코미디의 면면이 드러난다. 온몸에 힘을 뺀 이솜은 그 자체로 완벽한 미소다. 그가 이렇게 빛나는 배우였던가 싶다. 22일 개봉.
유선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