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내가 나인 것이 그냥 싫은 나이.’
누구나 겪는 10대 후반 고교 시절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민낯이 예쁜 걸 모르고 어울리지도 않는 분칠을 잔뜩 해 자신을 감추고 꾸미던 그런 시절이랄까. 영화 <레이디 버드>(4월4일 개봉)의 주인공인 크리스틴(세어셔 로넌)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의 가톨릭 고교에 다니는 열일곱 크리스틴은 손바닥만한 고향이 싫다. 화장실이 하나뿐인 낡은 집도 싫고, “철로 반대편 구린 쪽”인 가난한 동네도 싫고, 사사건건 간섭만 하는 엄마(로리 멧캐프)도 싫고, 심지어 흔해 빠진 이름도 싫다. 크리스틴이 스스로 지어 붙인 이름인 ‘레이디 버드’(Lady Bird)는 ‘나를 나이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망의 상징이다.
영화는 레이디 버드의 소소한 일상을 담담히 그린다. 멋진 집에 살고 싶고, ‘잘나가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고, 모델처럼 예뻐지고 싶고, 멋진 남자와 근사한 첫 경험도 하고 싶어 발버둥치는 평범한 10대 소녀의 삶 말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일삼고 때론 가족과 친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낡은 차를 타는 아빠가 부끄러워 교문 멀찍이서 내리고, 부잣집 남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단짝 줄리를 쉽게 외면한다. 레이디 버드의 목표는 새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에 있는 대학에 가 새로운 삶을 사는 것. 하지만 성적은 바닥을 기고, 부모님은 학비를 댈 여력이 없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좌충우돌 고3 생활 내내 꿈의 도시 뉴욕과 허세남을 향한 사랑에 눈멀었던 레이디 버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 자리 잡은 ‘진짜 사랑’에 눈을 뜬다. 함께 집 구경을 다니며 예쁜 집에 살고픈 로망을 대신하고, 중고품 가게에서 댄스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고르며 티격태격하던 엄마에 대한 사랑이 훨씬 깊었음을 깨닫는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시골이지만 아름다운 노을과 정겨운 친구를 볼 수 있는 새크라멘토에 대한 감정도 짙은 애증이었음을 알게 된다. ‘레이디 버드’ 대신 엄마 아빠가 지어준 진짜 이름 ‘크리스틴’을 긍정하는 마지막 부분은 이 질풍노도 역시 소녀가 한뼘 자라기 위해 겪은 성장통이었음을 증명한다.
<레이디 버드>가 흔해 빠진 성장담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레타 거윅 감독이 경험을 바탕으로 공들여 세공한 에피소드들 때문이다. 엄마와 말다툼을 하다 달리는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장면, 단짝 줄리와 성찬식용 전병을 감자칩 먹듯 주워 먹으며 깔깔대는 장면, 자신을 꾸중한 수녀님의 차를 웨딩카로 꾸미고 ‘지금 막 예수님과 결혼했어요’라는 글을 써 복수하는 장면 등은 쉴 새 없이 유쾌 발랄한 웃음을 자아낸다. 특히 엄마와의 관계를 리얼하게 그려낸 장면들에선 감정의 굴곡이 커지며 코끝이 찡해진다. 실제 새크라멘토에서 자랐다는 감독이 써내려간, “고향과 엄마를 향한 러브레터”라 할 만하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우리에게 <매기스 플랜>,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프란시스 하>의 배우로 익숙한 그레타 거윅 감독은 첫 연출작인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여성의 섬세함, 경험에서 우러난 진솔함, <프란시스 하> 등을 통해 갈고닦은 각본가로서의 역량이 합쳐진 빛나는 결과물인 셈이다. 불안정하고 미성숙하지만, 10대 특유의 엉뚱함과 당돌함을 지닌 크리스틴을 날것 그대로 표현해낸 세어셔 로넌의 연기력도 놀랍다.
새장을 떠나 날아간 크리스틴은 결국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까? 글쎄. 대학에서 만난 친구가 고향을 묻자 “샌프란시스코”라고 거짓말하고, 밤새 술 퍼먹고 응급실에 실려 가는 걸 보니 그럴 리 만무하다. 하지만 적어도 엄마에게 전화해 “사랑해, 고마워”라는 메시지를 남길 줄은 알게 됐다. 걱정할 것 없다. 소녀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꼭 너 같은 딸 낳으라”던 엄마 말을 이젠 딸에게 돌려주고 있는 모든 여성에게 권한다. 이왕이면 딸과 함께 보기를.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