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62년 차.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드라마, 시트콤, 연극, 영화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활약하는 배우 이순재(83)는 “오랜만에 주연을 한 작품이 개봉하게 돼 아이처럼 설렌다”며 연신 웃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이후 7년 만에 주연을 맡은 영화 <덕구>의 개봉(5일)을 즈음해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마주한 그는 “이 나이에 극의 90% 이상을 책임지는 주인공을 할 수 있는 작품이 어디 흔하겠냐. 할아버지는 변두리로 물러나 병풍 노릇이나 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욕심을 낸 것은 아니”다. 요즘 난무하는 막장도, 억지도 없는 ‘착한 영화’라는 점이 끌렸다. 순제작비 5억원의 작은 영화기에 출연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지금껏 주·조연도, 장르도 가리지 않고 오직 작품만 보고 선택해왔어. 이 영화도 마찬가지야. 영화가 참 소박하고 진솔해. 사랑이 결핍된 세상, 갈등만 가득한 세상에 오랜만에 따뜻한 이야기랄까? 삼대가 함께 봐도 좋을 작품이지.”
영화 <덕구>는 어린 손자·손녀와 함께 사는 덕구 할배 이야기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게 된 할배가 세상에 혼자 남겨질 두 아이에게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찾아주기 위해 홀로 먼 길을 떠나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았다. 러닝타임 내내 일흔살 할배 이순재와 일곱살 덕구 정지훈이 쌍끌이로 관객의 눈물을 쏙 빼는 영화다. 여든셋 베테랑 노배우와 열한살 천재 아역의 불꽃 튀는 감정연기 대결이랄까?
“내가 송승환, 윤유선, 안성기 등 유명 배우가 아역일 때도 함께 연기했지. 근데, 예전 아역과 요새 아역은 달라도 너무 달라. 옛날엔 용모가 좀 뛰어나다고, 작은 재간이 있다고 그걸 소질이라 여긴 부모가 밀어붙여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지. 하지만 요즘엔 스스로 선택을 하잖아? 지훈이만 해도 첫날 촬영을 보니, 너무 야무지더라고. 엔지(NG) 한 번을 안 내고 완벽해. 아이답지 않게 너무 잘할까 봐 오히려 걱정했다니까. 허허허.” 그는 촬영을 시작하며 덕구 역의 정지훈을 품에 안은 순간, 친손자 생각에 울컥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속 할배는 덕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너무 반듯한 할아버지인 데 견줘, 현실 속 나는 버르장머리를 가르치기는커녕 오냐오냐하는 손자 바보”라며 웃었다.
그는 최근 <아이 캔 스피크>의 나문희, <비밥바룰라>의 신구 등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동료 배우를 보며 안도감을 느낀다고 했다.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노배우는 다들 연기력이 출중해. 뒷구멍으로 용돈이나 좀 벌어 쓸까 하고 왔다 갔다 했다면 살아남지 못했겠지. 앞으로도 우리를 작품에 잘 활용하면 좋지 않을까? 드라마라면 시청률 1% 더 올리고, 영화라면 관객 10만명 더 동원할 자신이 있는데 말이야. 허허허.”
1956년 서울대 철학과 3학년 때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를 한 이순재는 그간 거의 한 해도 쉬지 않고 작품활동을 해왔다. <사랑이 뭐길래>, <허준>, <이산> 등의 드라마와 <거침없이 하이킥> 같은 시트콤, <꽃보다 할배> 같은 예능까지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기에 오늘날 ‘국민 할배’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따져보니 내가 영화만 해도 한 100여편 했더라고. 쉬면 할 일이 없어. 일하는 것 자체가 에너지를 주지. 또래 친구도 다 죽어서(웃음) 놀아 줄 사람도 없고…. 실제로 배우는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작품을 해야 해. 관객과의 소중한 약속이니까. 난 아버지 돌아가신 날 사극 녹화를 했고, 어머니 돌아가신 날 연극 공연을 했어. 부모님도 다 이해하실 거야. 난 배우니까.”
60년 넘게 전력질주를 해왔지만, 여전히 배우로서의 소망은 남아 있다. “그렇게 오래 연기를 했어도 ‘햄릿’ 역을 못 해봤어. 모두가 선망하는 역할인데, 타이밍을 놓치니 잘 안 되더라고. 키도 작고 일찍이 노역을 많이 해 그런가 봐. 허허허. 이젠 늙고 꼬부라져 햄릿은 못 할까? <시라노 드베르주라크>의 시라노 역도 다시 한 번 꼭 해보고 싶어.”
매 작품을 유작이라 여기며 최선을 다한다는 이순재는 “연기엔 끝이나 완성이 없기에 배우는 그걸 이루려 마지막까지 노력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했다. “욕심 같아선 또 주인공을 하고 싶지. 하지만 배우는 단 한 신에 출연하더라도 존재 의미만 있으면 돼. 세상엔 세 종류의 배우가 있어. 작품보다 못한 배우, 작품만큼 하는 배우, 작품보다 더 잘하는 배우. 연출과 작가의 의도를 뛰어넘는, ‘작품보다 잘하는’ 배우가 되려면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지. 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겠지.”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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