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때를 잊은 ‘공포’가 극장가를 휩쓸고 있는 봄, 호러영화의 공식을 전복시킨 독특한 작품 한 편이 관객을 찾는다. “쉿! 소리 내면 죽는다”라는 문구를 전면에 내세운 <콰이어트 플레이스>(12일 개봉)는 기존 영화가 공포를 부르는 주된 요소로 사용한 ‘소리’를 과감히 포기한다. ‘음소거’라는 색다른 설정은, 그러나 사뭇 단순한 구조의 이 영화에 극단의 공포감을 불어넣는다.
때와 장소가 분명치 않은 미국 어느 시골. 영화는 괴생명체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한 가족의 생존을 위한 사투를 그린다. 괴생명체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극도로 민감한 청각을 바탕으로 인간을 무차별 사냥한다. 온 세상이 초토화 된 가운데 가족은 도시를 떠나 한 농장에서 자급자족 방식으로 살아간다. ‘소리=죽음’이라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일상의 작은 소음마저 줄이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이어진다. 대화는 수화로 하고, 바닥에 모래를 뿌린 뒤 맨발로 걷는다. 달그락거리는 식기와 수저 대신 나뭇잎에 밥을 싸서 손으로 먹는다.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깜짝 놀랄만한 상황을 만들어 그로 인한 충격으로 공포를 유발하는 보통의 공포영화와 달리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관객을 주인공 가족이 처한 상황에 동화되도록 이끈다. 작은 소음마저 죽음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전개되며 관객도 가족과 마찬가지로 숨죽이고 스크린을 응시한다. ‘끼익’하는 의자 소리, ‘부스럭’하는 팝콘 소리, 긴장감에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까지 자제하며 어느덧 관객은 극도의 몰입감을 느끼게 된다. ‘음소거’라는 영화의 설정과 공포 분위기 속으로 관객이 자진해 걸어 들어가 1시간30분 간 ‘얼음’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셈이다.
영화는 아슬아슬한 일상에 균열을 낼 몇 가지 사건을 덧입힌다. 이를테면 엄마의 출산같은. ‘출산의 고통을 외마디 비명조차 없이 참을 수 있을까’, ‘자연스레 터져 나올 아이 울음소리는 어떻게 막을까’ 등 관객은 함께 근심하며 지켜보게 된다.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가족의 생존기를 뼈대로 한 공포영화지만, 한 편으로는 가족애를 그린 가족영화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가족의 마음속에는 ‘각자의 지옥’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재앙이 닥쳤고 그로 인해 미움을 받고 있다는 불안감을 지닌 딸, 가족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남은 아이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사로잡힌 부모. 그러나 속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말’이 소음이 되는 현실에서 ‘감정표현’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가족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만으로 위기를 헤쳐나가야만 한다.
이렇게 촘촘하게 짜인 공포의 거미줄에 걸린 관객은 ‘괴생명체의 정체는 무엇인가? 외계에서 왔는가?’, ‘왜 인류가 괴생명체를 처치할 손쉬운 방법을 찾아내기 전에 절멸했는가?’ 따위의 당연한 ‘의문’을 쉽게 내려놓게 된다.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의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것은 ‘말이 필요 없는’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진짜 부부인 배우 에밀리 블런트와 존 크래신스키가 각각 엄마아빠 역할을 맡았다. 실제 청각 장애를 지닌 밀리센트 시몬스와 <원더>로 얼굴을 알린 노아 주프가 남매로 출연해 빼어난 표정 연기를 선보인다.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을 제치고 북미 등 전 세계 9개국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공포영화의 흥행력을 재증명한 <겟아웃> 열풍을 잇는 모양새다. <곤지암>이 휩쓸고 있는 한국 영화시장을 넘겨받아 ‘공포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을지도 관심이 쏠린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