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배우 임수정(39)에게서는 ‘식물성 향기’가 물씬 났다. 단지 그가 지난 3년 동안 ‘채식주의자’로 살아와서만은 아니다. 힘을 쪽 빼고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긴다는 듯 순순하게 답하다가도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말할 땐 한 구절 한 구절 힘을 주는 모습에서, 연약해 보이지만 뿌리를 단단히 내린 들꽃이 떠올라서다. 이번에 출연한 영화 <당신의 부탁>(19일 개봉)도 이런 모습과 맞닿아 있는 모양새다. 개봉 전 서울 명동 씨지브이 씨네라이브러리에서 만난 임수정은 “이 영화를 찍으며 연기 면에서 한층 유연해졌다”고 했다.
<당신의 부탁>은 사고로 남편을 잃고 살아가는 서른둘의 효진(임수정) 앞에 남편의 아들인 열여섯 종욱(윤찬영)이 갑자기 나타나면서 새로운 가족이 형성돼 가는 과정을 담담히 그려냈다. 지난해 <더 테이블>(김종관 감독)에 이어 연달아 다양성 영화를 선택한 데 대해 임수정은 “사실 작은 영화에 천착하게 된 지는 몇 년 됐다”고 했다. “크고 작은 영화제의 심사위원을 하다 보니 다양성 영화나 단편영화를 다시 보게 됐어요. 다채로운 소재가 살아 숨쉬고, 감독의 개성이 풍기는 이런 영화가 바로 한국 영화의 힘이었지 싶더라고요. 한국 상업영화의 르네상스기에 참여해 배우로 성장해온 제가 이제 한국 영화 시장의 균형추를 맞추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겠다 생각했어요.” 이런 생각에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가 올 때마다 겁도 없이 덥석덥석 참여를 하게 되더라며 웃었다.
<당신의 부탁>에는 다양한 ‘엄마’의 모습이 등장한다. 영문 제목도 ‘Mothers’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종욱에게 졸지에 엄마 노릇을 해야 하는 효진, “나처럼 살지 말라고 키워놨더니”라는 말을 달고 사는 효진의 엄마(오미연), 갓 아이를 출산한 효진의 절친 미란(이상희),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가진 아이를 입양 보내기로 한 종욱의 친구 주미(서신애)까지…. 영화는 ‘혈육’이 아닌 더 넓은 의미의 엄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저도 첫 엄마 역할 도전이잖아요? 직접 낳은 아이와의 이야기였으면 경험하지 못한 영역이라 힘들었을 텐데, 갑자기 나타난 다 큰 아이의 엄마가 돼야 하는 당혹스러움, 난감함 등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더라고요. 작품을 하면서 혈연관계가 아니라도 엄마가, 가족이 될 수 있구나 깨달았어요. 한국에도 재혼가족, 입양가족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하는데, 우리 인식이 그걸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고요. 영화를 보면서 저처럼 관객의 시선도 바뀌기를 바라요.”
종욱 역의 윤찬영(17)과 서먹했던 관계가 되레 연기에는 도움이 됐단다. “찬영이는 아직도 저를 ‘호칭’으로 부르지 않아요. ‘누나’라고 부르기엔 나이 차이가 너무 많고(웃음), ‘엄마’는 더 어색하잖아요? 종욱이에겐 제가 엄마와 누나 사이 어디쯤일 거라 생각해요. 둘 사이의 ‘어색한 공기’가 영화에 많이 반영됐으면 좋겠다고 감독님께 제안했고 실제로도 많이 담겼어요.” 그러면서도 “찬영이는 열정으로 가득 찬 좋은 배우가 될 재목”이라며 ‘아들 칭찬’에 여념이 없다.
임수정은 30대가 좋다고 했다. 20대와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원하는 삶의 방식이 선명해진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지나고 보니 필모그래피에서 시행착오들이 보여요. 이젠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느리더라도 천천히 찾게 돼요. 물론 영화 속 효진의 대사처럼 ‘선택을 하면 나머지는 포기해야’ 하죠. 사람들 기억 속에 잊힐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배우는 자신에게 딱 맞는 역할을 만나면 부활할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어요. 그러니 작은 반응에 휘둘리지 않게 되더라고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시나리오를 고르는 기준도 달라졌다. 주변에서 말려도 ‘마이웨이’를 외치는 캐릭터에 눈이 간단다. “<당신의 부탁> 속 효진도 그렇잖아요? 남들 다 말려도 아이를 데려오죠. 시나리오 속 캐릭터가 혼자 외로운 길을 가고 있으면, ‘너 혼자가 아냐. 내가 같이 가줄게’ 하는 느낌이 들어요.(웃음)” 아직까지도 사람들 뇌리 속에 ‘풋풋하고 수줍은 소녀’로 기억된다고 하니 “어리게 봐주셔서 고맙지만, 한편으론 풋풋한 시절의 이미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기억을 관객에게 심어주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해 아쉽다”고 했다.
최근엔 김혜리 기자와 함께 진행하는 팟캐스트 ‘필름클럽’의 재미에 푹 빠져 있는데 나만의 영화나 프로그램을 기획해 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단다. “채식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보면 어떨까요. ‘채식주의자의 미식여행’ 같은 프로그램도 좋겠어요. 언젠가는….(웃음)”
느리지만 계속해서 또박또박 써내려갈 필모그래피 역시 ‘그의 스타일’에 맞게 풍성해지지 않을까.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