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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최초 여성 주례·할리우드 진출 1호…영화인들이 말하는 ‘최은희’

등록 2018-04-17 16:00수정 2018-04-18 10:12

영화배우 최은희. 씨네21
영화배우 최은희. 씨네21

“우리는 지금 ‘여배우 최은희의 죽음’이 아닌 ‘한국 영화사의 빛나는 별이 진’ 이야기를 하려 한다.”

향년 92살로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을 살다 간 최은희의 별세 소식에 영화인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 단지 배우로서가 아니라 신상옥 감독(1926~2006)과 함께 세운 ‘신필름’(1960)의 공동 운영자이자, 우리나라 세 번째 여성 영화감독, 그리고 ‘납북-탈출-망명-귀국’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여로에서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고인에 대한 ‘헌사’가 이어졌다.

1942년 연극<청춘극장>으로 데뷔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성춘향>(1961), <상록수>(1961), <빨간 마후라>(1964) 등 13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고 최은희. 고인과 살아생전 인연이 있었던 5명의 영화인이 ‘인간 최은희’에 대한 애틋한 사연을 전해왔다.

이장호 감독. <한겨레> 자료사진
이장호 감독. <한겨레> 자료사진
■ 이장호 감독 1965년 연출부로 신필름에 입사했을 때, 신필름은 ‘거대한 왕국’으로 느껴졌다. 당시 충무로는 사장부터 운전사까지 5~6명으로 구성된 작은 규모의 사무실 50여개가 난립하던 시절이었는데, 신필름 월급을 받는 직원만 200명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기업에 입사한 것이라 자긍심을 느꼈다. 최은희 선생님은 그 왕국의 ‘여왕’이었다. 사무실에 출근할 때면 늘 ‘할리우드 스타’를 보듯 최 선생님을 바라보곤 했다.

내게 최 선생님이 더 각별한 이유는 1972년 나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셨기 때문이다. 당시 신 감독의 조 감독으로 활동할 때라 처음엔 신 감독에게 부탁했으나 “쑥스럽다”며 완강히 거절하셨다. 반면 최 선생님은 흔쾌히 “그러마” 하셨다. 원래 카리스마와 결단력이 남다르신 분이셨다. 이 주례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주례’로 기록됐다. 아직 영화 입봉(데뷔)도 못했던 나는 이 결혼식으로 주간지 표지를 장식하며 매스컴 데뷔를 하게 됐다. 나중에 이혼하게 돼 얼마나 죄스럽던지….

매사 관대하고 포근한 최 선생님도 영화에 관해서는 꼼꼼하고 까다로운 분이었다. 60년대는 후시녹음의 시대였다. 김지미씨 등 스타 배우들은 겹치기 출연을 많이 해 바쁜 와중이라 성우를 시켜서 후시녹음을 하게 했다. 하지만 최 선생님은 단 한 편도 빼놓지 않고 직접 후시녹음에 참여했다.

후배 연기자의 연기지도에도 열심이셨다. 신필름에 연기실이 있었는데, <아씨>에 출연했던 배우 김희준에게 호되게 연기지도를 하시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당대 최고 스타 신성일씨의 예명을 지어준 것도 최 선생님이시다.

황기성 영화제작자. <한겨레> 자료사진
황기성 영화제작자. <한겨레> 자료사진
■ 제작자 황기성 1964년 입사해 7년여를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신필름의 전성기를 함께 했다. 신필름 하면 신상옥 감독을 떠올리지만 사실 신필름의 절반은 최은희씨의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여배우가 아닌 ‘영화인’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다. 최씨가 연출에 직접 뛰어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965년 그는 <민며느리>로 감독 데뷔를 하며 우리나라의 세 번째 여성감독이 됐다. 당시 “배우로 열정을 불태웠으니 이제 감독으로 영화와 함께하고 싶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던 기억이 난다. 작업 하는 내내 신이 나서 얼굴에 윤기가 돌았다.

영화에 대한 애정은 서울, 평양, 망명지 미국,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계속 이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인생의 굴곡 속에서 영화를 계속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최씨와 신 감독은 북한을 탈출한 뒤 할리우드에서 ‘신 프로덕션’을 설립해 <쓰리 닌자>(1993)를 제작했고, 미국 1500개 극장에 배급했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한국인 1호’인 셈이다. 당시 할리우드에 인사차 방문했을 때 최씨가 유쾌하게 웃으며 촬영장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보고 ‘천상 영화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여성으로서도 최씨는 품이 넓은 사람이었다. 두 아이를 입양했고, 신 감독과 오수미씨와 사이에 난 아이 둘도 자신의 아이처럼 아꼈다. 신 감독이 말년에 간 이식 수술을 받았는데, 입양한 명희씨 남편, 즉 사위(서동엽)가 간 이식을 해 준 것만 봐도 최씨가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으로 키웠는지를 알 수 있다.

김두호 전 영화평론가협회장. 인터넷365누리집.
김두호 전 영화평론가협회장. 인터넷365누리집.
■ 김두호 전 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최은희씨가 북한 탈출 후 미국을 통해 한국에 처음 돌아왔을 때 인터뷰했고, 2007년에도 단독 인터뷰를 하는 등 여러 차례 최씨를 대면할 기회가 있었다. 최씨 인생의 중요한 키워드는 ‘남편 신상옥 감독’과 ‘영화’였다. 남과 북으로 갈라선 현대 민족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남편과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삶을 도도하

고 우아하게 살아낸 분이다.

신 감독 타계 후 1년이 지나 자택에서 인터뷰할 때 벽에 걸린 커다란 신 감독 사진이 제일 눈에 띄었다. 최씨는 자존심과 고집이 센 여자지만, 신 감독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전생에 인연이 있다 해도 우리 같은 인연은 없을 것”이라며 남다른 애정을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살아생전 신 감독도 끔찍이 최씨를 아꼈다. 촬영장에서는 거칠고 욕설도 잘하는 신 감독이었지만 아내에게는 언제나 “최 여사”라고 부르며 예우를 해줬다.

납북 당시를 떠올리면서도 최씨는 북한에 대해 원망은 하지 않았다. 배우로서 대우를 받으며 영화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남한에는 남아 있지 않은 <빨간 마후라> 등 옛 필름을 김정일이 대부분 소장하고 있어 내가 출연한 50년대 작품도 그곳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며 “<상록수>를 영화 교육 교재로 활용하고 있었고, <평양 폭격대>, <빨간 마후라>는 반공영화인데도 보존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고 했다. 이데올로기를 떠나 예술로는 남북 분단이 없는 세계를 살다 가신 분이다.

문희 배우. 연합뉴스
문희 배우. 연합뉴스
■ 배우 문희 나는 1965년에 데뷔를 했지만, 결혼하는 바람에 정작 배우로 활동한 시간은 6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최 선생님은 67년에 신필름에서 제작한 <이조잔영>이라는 영화에 참여하며 처음 만났다. 따뜻하고 우아한 분이셨다. 그 후엔 영화제 등 공식 석상에서 뵙고 “아 정말 아름답고 대단한 선배님이구나”라는 감탄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함께 한 작품은 없지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등으로 이미 당대 최고의 여배우 자리에 오른 분이라 존경하는 마음으로 우러렀다.

최 선생님과 사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2006년 내가 가톨릭에 입문하면서다. 당시 선생님이 ‘대모’를 서주셨다. 대모는 말 그대로 ‘신앙적인 어머니’를 의미하기에 종교적으로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셨다. 신상옥 감독님이 돌아가시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하셨는데, 투석하면서도 정신이 맑은 날엔 전화를 해주셨다. “보고 싶다, 놀러 와라”고 조곤조곤 말씀하셨다. 꽃이라도 보내드리면 “덕분에 집안이 환해졌다”며 꼭 답례 전화를 주셨다. 휠체어 생활을 하시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 않으셨던 분이다. 가끔 찾아뵙고 식사도 하면서 말년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했다.

조선희 소설가. <한겨레> 자료사진
조선희 소설가. <한겨레> 자료사진
■ 조선희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소설가 우리는 최은희의 직업을 배우라고만 알고 있지만 그는 감독이기도 했다. 신상옥 감독은 자신이 연출하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최은희에게 여주인공을 맡겼을 뿐 아니라 최은희를 감독으로 데뷔시켜 세편의 작품을 찍도록 했다. 신상옥은 최은희에게 프로포즈할 때 “당신을 보고 싶으면 앞으로 찍을 영화들이 떠오른다”고 했다니, 최은희는 신상옥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최은희는 신상옥의 도움으로 세번 ‘살아났다’. 신상옥은 북한에 납치된 최은희를 찾으러 갔고 결국 구출했다. 첫남편의 상습적 폭력에 시달리던 최은희를 구해냈으며, 여배우로서 재능을 살렸다. 이혼 등 두 사람 사이에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60년 가까이 서로에게 뮤즈이자, 메시아로 살았다.

신상옥이 세상을 떠난 뒤 혼자 남은 최은희의 모습은 낯설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대만에서 발굴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열녀문>이 2006년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됐는데, 최은희는 인사말을 하러 혼자 무대에 올라 ‘신 감독’ 이야기를 하다가 여러차례 눈물을 흘렸다. 이듬해 <열녀문>이 칸 영화제 클래식 섹션 복원 부문에 초청돼 칸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곧바로 “다 신감독하고 다니던 곳인데 혼자 가기 싫다”고 완강하게 말씀하셨다. 남은 생은 모두 신 감독 기념사업에 보내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10여년을 살다 가셨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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