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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우리의 ‘믿음’에 대한 담대한 해체의 몸짓

등록 2018-07-03 05:01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이창동 감독의 ‘버닝’
영화 ‘버닝’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영화 ‘버닝’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호화장정으로 출간된 존 파워스의 왕가위 인터뷰 집을 읽다가 이제 영화인들이라면 누구나 체감할 수 있는 구절을 읽었다.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의 뉴웨이브 전성기(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알랭 레네, 장 뤽 고다르, 오시마 나기사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내러티브를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한 감독들이 부상했던)가 지난 후, 감독들과 대중 모두 의욕이 많이 꺾였다. 영화가 이전의 모습, 즉 이야기 전달 장치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왕가위는 그런 식의 이야기 전달에 관심이 없었다.” 왕가위의 스타일이 현대 영화계에서 예외적이라는 걸 지적하는 이 구절에서 대중은 물론이고 감독들도 의욕이 많이 꺾였다고 쓴 게 흥미로웠다. 의욕 문제도 있겠지만 의지 문제도 있을 것이다.

최근 창간된 격월간 영화비평잡지 ‘FILO’ (이 책은 강력 추천한다.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국내외 평자들의 주옥같은 비평들이 수록돼 있다)를 읽다가도 최근 영화 흐름에 시사점을 주는 문구를 발견했다. 허문영 평론가와의 문답으로 실려 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평론가이자 존 포드 감독 연구자인 태그 갤러거의 인터뷰에서 태그 갤러거는 현재의 영화가 더이상 흥미롭지 않다고 말하면서 상업적인 영화는 물론 영화제에서 트는 예술영화에 대해서도 냉정한 의견을 밝힌다. “일종의 ‘온실’ 영화도 존재한다. 주로 영화제나 미술관에서 상영되며 종종 대중 관객을 외면하고 할리우드 황금기에 꽃핀 정감이나 포괄성에는 관심조차 없는 아주 사적인 작업들이다. 오늘날 그런 정감과 포괄성은 더이상 ‘감독’의 영화라 할 수 없는 고예산 TV 시리즈들에서 발견된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한 편의 한국영화를 떠올렸다. 이야기를 실험했지만 아쉽게도 영화제에서만 인정을 받았던 영화, 이창동의 <버닝>이다.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면 또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 영화가 수상에 실패한 후 받은 일부 평가는 좀 모욕적인 데가 있었다. 관객의 댓글이 아니라 언론의 칼럼에 버젓이 실린 칼럼 중에는 이 영화가 미국의 신인 독립영화감독들이 만든 영화보다 못하다고 뻔뻔스럽게 질책하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창동의 영화가 모두 망각했거나 자본의 간섭에 겁을 먹고 퇴각해버린, 이야기를 대담하게 실험한 드물고 귀한 시도라고 본다. 그게 실험적이어서 귀한 것이 아니다. 이분법적 판단을 강요하는 이 사회의 지배적 담론 경향에 맞서 영화 예술의 형식을 통해 우리가 보고 듣고 읽고 믿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자문하게 하는 담대한 해체의 몸짓을 보여주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 이야기의 인과논리는 무시되지만 그 와중에 어디 불이라도 싸지르고 싶은 이 시대의 집단적 분노를 섬세한 이미지의 화면으로 위무하며 그걸 통해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사려 깊게 권한다. <버닝>은 이후로도 자주 곱씹어봐야 할 중요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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