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지워주는 남자’에서 주인공 예슬은 강함과 섹시함을 동시에 요구하는 세상에 맞서, 메이크업을 통해 강하고 위협적인 여전사의 모습으로 거듭난다. 웹툰 화면 갈무리
‘순정’이라는 단어가 ‘여성만화’를 대표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유리구슬이 한아름 쏟아질 것 같은 커다란 눈망울의 주인공들이 펼치는 사랑 이야기가, 여성에 의한/여성이 좋아하는 만화의 대표 선수로 여겨지던 때였다. 하지만 이런 여성만화의 과거에 ‘실선’이 그어지고 있다. ‘순정’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간 여성만화들이 폭발하면서다. 그 현장은 웹툰. 여성들의 현실을 재현하는 거울이자, 현실의 징후를 보여주는 선행지표로서 웹툰에 날개가 돋아났다. 외모를 둘러싼 차별과 압박의 문제를 다룬 <껍데기>(김탐미). <화장지워주는 남자>(이연) 등이 10위권 안에 이름을 올리며 인기를 얻고 있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으며 허세도 있는 여성 캐릭터를 내세운 <먹는 존재>(들개이빨)는 레진코믹스 수요웹툰 1위를 달리며 인기를 모았다. 민사린이라는 여성을 통해 시댁과의 갈등, 성평등, 가사노동 문제 등을 다룬 <며느라기>(수신지), 딸의 죽음 이후 모녀가 살아가는 이야기로 성폭력 피해자의 아픔과 생존 문제를 서늘하게 그려낸 <아 지갑놓고 나왔다>(미역의 효능)는 ‘2017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했다.
한 포털 웹툰 피디(PD)는 “최근엔 ‘생활툰’은 물론이고 과거 남성적 장르라 여겨졌던 스릴러나 판타지에서도 주도적인 성격의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작품들이 많아졌다”며 “여성 주인공의 비율이 높아지거나 여성 시점의 스토리가 등장한 것은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말했다. 칼럼니스트 위근우는 “굳이 페미니즘 웹툰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더라도 동시대 여성의 현실을 재현하는 ‘여성 서사 웹툰’이 작지만 분명히 가시적으로 늘어났다”고 말한다.
‘먹는 존재’의 주인공 유양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시원시원한 대사로 관객들에게 해방감을 선사한다. 웹툰 화면 갈무리
최근 독립연구자를 위한 프로젝트(‘궁리’)로 시민 펀딩을 받아 ‘코믹스 페미니즘:웹툰시대 여성만화 연구’(조경숙·박희정 공저) 논문을 쓴 만화평론가 조경숙은 여성 웹툰이 약진한 시기를 2015년으로 잡는다. 2015년은 온라인에서 자행되는 남성들의 폭력에 맞서 영페미니스트 커뮤니티 ‘메갈리아’가 탄생했으며, 각종 일탈과 범죄가 행해지는 소라넷폐쇄운동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난 해다. 조경숙은 “웹툰은 트렌드에 민감한 장르이기 때문에 작품과 현실이 상호작용해 핫 이슈가 반영되기 마련”이라고 했다. 상업영화 같은 대중문화산업에 비해 웹툰은 자본의 영향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웹툰 작가들이 좀더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여성만화의 주제를 크게 나눠보면, 외모차별, 일하는 여성, 성폭력 등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최근엔 탈코르셋 운동의 흐름을 타고 외모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많다. 특히 외모를 따지는 세상에 상처 받으면서도 상황을 주도적으로 헤쳐나가는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이 인상적이다. <화장지워주는 남자>를 보자. 여대생 김예슬은 “대학만 가면 다 예뻐지니 공부만 해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철썩같이 믿고 자란 순종적 캐릭터다. 배워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으니 화장할 줄도 모른다. 여신같은 외모를 갖춘 또래 주희원을 동경하며 ‘주희원 같이 해달라’고 메이크업숍을 찾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롱뿐이다. 이때, 마음껏 그림 그릴 수 있는 백지 캔버스 같은 외모, 즉 “밋밋한 얼굴”을 찾던 천재 메이크업 아티스트 천유성이 등장한다. 평범하고 소심한 예슬이 남자의 도움으로 ‘메이크업 신데렐라’가 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강하며 섹시한 여전사’의 이미지로 자신을 꾸미려는 천유성에게 예슬이 묻는다. 왜 강한데 섹시해야 하냐고. 나는 그냥 강하고 위협적인 존재이길 원한다고.
‘껍데기’의 한태희는 7천여만원이 넘는 성형 수술을 받고 누구나 꿈꾸는 ‘미인’이 된다. 웹툰 화면 갈무리
옛 여자친구의 얼굴과 꼭 닮게 여성들의 얼굴을 고치는 성형외과 의사가 등장하는 스릴러 <껍데기>에선 “더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수술을 선택한” ‘사각마녀’ 한태희가 나온다. 7000여만원 넘는 수술을 받고 대중들 앞에 나선 한태희는 환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외친다. “저는 성형수술을 해라 마라, 예쁜 걸 좋아해라, 말라가 아니에요. 적어도 외모로 상처는 주지 말자는 거에요. 사회가 외모로 차별을 하고 가해를 하기 때문에 저처럼 많은 사람들이 못생겨도 죄고 성형해도 죄. 우리가 심판해야할 건 성형을 택한 사람들이 아니라 성형을 하게끔 상처 주고 편견을 만드는 사람들이에요.” 평생 주눅들며 살아온 피해자임에도,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의 본질을 통찰하며 의견을 당차게 밝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외모를 얻게 되면 외모차별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외부의 시선과 압박이 해소되지 않고선 외모는 ‘더 예쁘게, ‘더 아름답게’를 향해 영원한 비교급이 될 수밖에 없다. <껍데기>에선 ‘가장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고 결국 무리한 성형수술을 받다가 식물인간이 되는 여배우가 등장한다. 아름다운 외모가 지닌 권력은 항상 외부의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에 결코 온전히 손아귀에 들어올 수 없는 법. “주희원은 알고 있다. 아름다움에 권력이 따라붙는다는 걸. 물론 그 권력은 진정한 것이 아니고, 결국 권력을 누가 부여하는지도 알고 있다. 왜 그녀는 진짜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아름다움을 놓지 못하게 된 걸까.”(<화장지워주는 남자>)
이런 맥락에서,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여성 ‘유양’을 주인공으로 한 <먹는 존재>는 한없는 해방감을 선사한다. ‘거만하고 천박하고 유머감각도 없으면서 손버릇은 착실하게 나쁜’ 상사 김광배가 노래방에서 소주를 강권하며 동료를 성희롱하자 유양은 ‘진상 상사’의 얼굴에 굴을 철퍼덕 집어던지고 회사를 나온다. “훠궈에 넣으면 뭐든지 맛있어지는 것 같다”며 해맑게 웃는 친구에게 “김광배도 훠궈에 넣었다 빼면 맛있어질까?”라고 반문하고, “대물이라도 나발이라도 김광배에 달려있으면 다이아몬드 둘러박은 말자지라도 싫다”고 툭툭 던지는 유양을 보면서 여성 독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먹는 존재> 이후 나온 <홍녀>의 여성들은 좀더 과격하다. 눈에 힘 한번 주면 수컷들을 죽여 원하는 물건으로 만들 수 있는 초능력 중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홍녀>는 언어로 또는 흉기로 여성을 죽이는 사회에 대한 미러링이다. 주차 잘못 했다고 소리를 질러대며 위협하는 남자를 죽여 사과로 바꾸고, 그 사과를 끓여 잼을 만들고, 남편으로 만든 밀폐용기에 그 잼을 보관하는 식이다. ‘남자 살해’라는 설정에 대해 위근우는 “남성을 죽여도 남성 독자는 기분이 나쁠 뿐 실제로 공포에 떨고 행동이 제약되진 않는다는 점에서 ‘남혐’이라고 보긴 힘들다”고 말했다.
‘홍녀’는 수컷만 골라 죽이는 초능력을 지닌 중년 여성이 주인공이다. 웹툰 화면 갈무리
상상력은 싱싱하지만, 여성만화의 상황은 그 자체로 여성이 처한 현실의 굴레를 보여준다. 2017년 서울시가 발표한 ‘문화예술불공정실태조사’를 보면 만화·웹툰 작가의 월평균 수입은 남성 평균 222만원, 여성 평균 166만원으로 성별에 따라 평균 60만원 가까이 차이가 났다. ‘여성작가’ ‘여성만화’라는 것만으로도 낙인이 찍힌다. 웹툰업계에선 특정 작품에 ‘페미니즘 만화’라는 수식어를 붙이길 꺼린다. 작가들에게 자칫 거친 비난과 조롱이 쏟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작가가 닉네임을 사용하고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작가의 성별이 알려지는 순간부터 작가는 여성창작자로서의 리스크와 도덕적 압박을 견뎌내야 한다”(<코믹스 페미니즘…>)고 지적한다. 만화가 여성의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는가도 작가들에게 놓인 묵직한 과제다. <먹는 존재>의 유양처럼 상사에게 통쾌한 복수를 날리는 일은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하다. 들개이빨은 이메일 인터뷰에서 “내가 여성이니 자연스럽게 여성이 세상의 보편이라 여기고 살려고 하고 있고, 작업물에도 세상의 압력에 신경쓰지 않는 여성들을 한가득 등장시키고 싶은데 이따금씩 너무 무책임한 도피심리로 느껴진다. 끔찍한 현실 앞에서 머리만 땅에 박고 나몰라라하는 타조의 습성과 다를 바 없지 않는가 고민스럽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부지런히 현실의 변화를 실어나르기에 웹툰의 진화는 계속될 것이다. <아랫집 시누이>가 나온 2014년만 해도 만삭의 며느리가 부엌일을 하는 장면에 독자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2017년 <며느라기>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오자 비난 댓글들이 빗발쳤다. 독자들이 빠른 속도로 성차별에 예민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경숙·박희정은 논문을 통해 “웹툰 커뮤니티 자체에서 페미니즘이 이슈화되면서 로맨스 플롯 이상의 상상력이 발휘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며 “역동적 페미니즘의 주체인 여성들이 웹툰의 적극적인 생산자·소비자로서 개입됨에 따라 앞으로도 여성만화는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