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평양에서 영화 배운’ 다큐 감독, 안나를 만났다

등록 2018-09-11 17:04수정 2018-09-11 21:16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 감독 인터뷰-
현실고발 영화 찍으려다 ‘선전영화’ 배우러 평양행
박정주·리관암·윤수경 등 북한의 유명 영화인 출연
“옛 독일 카메라 사용하는 걸 보니 아련한 추억”
“남한 사람들 평가 궁금해 잠 못 잘 지경”
안나 브로이노스키 감독. 독포레스트 제공
안나 브로이노스키 감독. 독포레스트 제공
“북한 주민이 김정일 부자에게 세뇌당한 것처럼 우리도 자본주의나 다국적기업의 마케팅에 세뇌된 것 아니냐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론 서양 미디어가 ‘악의 축’으로 표현하는 북한이 아니라 북한 주민의 평범한 일상과 북한 영화인의 열정을 담고 싶기도 했고요.”

호주의 탄층 가스 채굴 위협과 북한식 선전영화? 거리가 백만 광년을 떨어져 보이는 두 가지 소재를 접목한 신박한 다큐멘터리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의 개봉(13일)을 앞두고 10일 중구 충무로 한 카페에서 만난 안나 브로이노스키 감독은 “<안나…>가 남한에서 다양한 논쟁을 불렀으면 한다”고 했다. ‘혁명적 코믹 어드벤처’를 내세운 이 작품은 호주에서 다국적기업이 대규모 탄층 가스 채굴을 시도하자, 그 위험성을 알리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선전영화’의 대명사인 북한영화를 배우러 평양행을 택한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소 황당하고 발칙한 발상만큼 영화도 시종일관 재기발랄하고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브로이노스키 감독은 해외 영화인 최초로 북한의 정식 허가를 받아 2012년 방북해 3주 동안 평양에 체류하며 북한 영화 제작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평양에 발을 딛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던 터다. “처음엔 북한 영사관에 서신을 보내 촬영 요청을 했어요. 당연히 답신이 없었죠. 온라인 브로커도 접선했는데, 7만유로(한화 9천만원)를 요구하더라고요. 하하하. 돈이 없어 포기했죠. 마지막으로, 20년 동안 관광회사를 운영해 북한에 연줄이 많은 사업가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미친 짓인 걸 알지만 김정일 영화 교본인 <영화와 연출>에 따라 작품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너무 신선하다’며 적극 도와줬어요.” 그렇게 2년여의 노력 끝에 그는 베이징발 평양행 고려항공에 몸을 실었다. 북한영화를 배우겠다는 자세를 당국이 ‘문화교류’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본 것 같다고 했다.

다큐멘터리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의 한 장면. 독포레스트 제공
다큐멘터리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의 한 장면. 독포레스트 제공
“저는 도쿄에서 태어났어요. ‘88서울올림픽’ 당시 주한 호주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머무르며 디엠제트(DMZ)도 방문했어요. 그 후 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며 유년시절을 보냈죠. 서구 언론의 상투적 평가에 매몰되지 않고 북한에 직접 가보자는 용기를 낸 건 이런 경험의 영향도 크죠.”

다큐에는 내로라하는 북한 영화인이 대거 등장한다. 영화계 원로 박정주 감독, ‘북한의 올리버 스톤’ 리관암 감독, 김정일이 가장 아꼈다는 배우 윤수경과 리경희 인터뷰 등도 담겼다. “박정주 감독님과 정이 많이 들었어요. 마치 삼촌처럼 저를 챙겨주셨죠. 헤어질 때 다시는 못 만날 걸 알고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겉으론 주체사상만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화에 대한 열정에 불타는 분이셨어요. 같은 영화인으로서 감동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다큐에는 북한 영화에 대한 노하우를 성심성의껏 알려주는 감독들 모습이 담겨 있다. 시종일관 진지하지만 그 모습이 되레 빵 터지는 웃음을 선사한다. 이를테면 배우 연기가 맘에 들지 않자 ‘건물 한 바퀴 돌고 오라’, ‘제자리에 앉았다 일어섰다 반복하라’는 등의 ‘얼차려’를 주거나 노감독이 직접 나서 연기 시범을 보이는 식이다.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 포스터. 독포레스트 제공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 포스터. 독포레스트 제공
촬영을 둘러싼 재밌는 에피소드도 풀어놨다. “제가 출연하는 장면에서 리관암 감독이 계속 뭐라 중얼거리는 거예요. 통역사가 ‘예쁘다는 뜻’이라고 둘러댔지만, 호주에 돌아가 번역해보니 ‘노처녀처럼 자글자글한 주름 좀 화장으로 커버해주라’는 내용이었어요. 하하하.”

영화에는 북한 최대 국립영화제작소인 조선예술영화 촬영소도 등장한다. 총 면적 100만㎡에 이르는 야외 촬영지에는 옛 조선과 일본, 중국, 서울, 유럽을 재현한 세트도 들어서 있다. “70년대 말쯤 김정일이 직접 지시해 만든 세트인데, 노후한 흔적도 많았죠. 북한은 아직도 디지털이 아닌 필름으로 촬영해요. 옛 독일 카메라를 사용하는 모습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어요. 그들은 낡은 장비를 부끄러워하며 저의 최신식 소니 카메라 작동법을 알려달라 졸랐지만요. 문화의 갈라파고스 같다는 느낌과 순수하고 아이 같은 느낌이 겹치더군요.”

예상을 뛰어넘는 150%의 협조를 해 준 북한이지만, 정부 관리가 늘 촬영현장을 지켜봤고, 북한을 떠날 땐 촬영본이 담긴 하드디스크를 보여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단다. “원칙은 간단했어요. ‘김정일 일가와 관련된 장면은 초점을 확실히 맞춰 찍어라. 군인이 나오는 장면은 절대 안 된다’였죠. 평양 시내를 와이드로 찍으면서 군인 행렬이 나온 장면을 삭제하라고 했는데, 저를 안내했던 북한 인사가 두둔해 겨우 살려서 나올 수 있었어요.”

다큐멘터리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의 한 장면. 독포레스트 제공
다큐멘터리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의 한 장면. 독포레스트 제공
감독은 북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호주 배우들과 <가드너>라는 단편 영화를 완성한다. 이 영화 속 영화는 코믹하고 과장되고 때론 어색한 느낌이 역력하다. 주인공이 애국심에 호소하는 연설을 하거나 다함께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는 등 북한식 선전영화의 요소가 고루 들어있다. “북한 영화인들이 ‘훌륭하다, 안나’를 외칠 땐 부끄럽기도 했어요. 어떤 성과를 내기보단 영화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유대감과 공감대를 쌓는 즐거움에 제일 집중했거든요.”

그는 영화 개봉에도 큰 힘이 된 남북화해 분위기에 관심이 많았고, 인터뷰 도중 관련 내용을 다양하게 묻기도 했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트럼프-김정은 싱가포르 회담 덕에 상영 기회를 잡았어요. 운이 좋았죠. 남한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요? 제 영화가 평화 분위기 조성에 한 몫을 할까요? 설렘과 궁금증에 잠을 이루지 못할 듯해요.”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