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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잔인했던 1991년 봄을 다시 봄

등록 2018-10-31 08:12수정 2018-10-31 09:24

권경원 감독 영화 ‘1991, 봄’

강경대·김귀정 등 스러진 11열사에
유서대필 조작 누명 쓴 강기훈까지
91학번 눈으로 본 잔혹한 국가폭력
강기훈의 기타 선율에 다큐로 녹여
강기훈씨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강기훈씨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1991, 봄>의 권경원 감독.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31일 개봉하는 <1991, 봄>은 <1987>의 후속편 같은 영화다. 하지만 분위기는 정반대다. <1987>이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끝맺으며 희망을 보여줬다면, <1991, 봄>은 그 이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는지를 냉철하게 되짚는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얻어냈지만,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면서 사실상 군사정권이 이어진다. 국민들은 19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 구도를 만들었지만, 1990년 여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면서 거대보수여당이 탄생했다. 1991년 봄,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정권은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전경에게 맞아 숨진 걸 시작으로 5월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씨까지 11명의 청춘이 정권의 불의에 항의하다 줄줄이 스러졌다.

영화 <1991, 봄> 한 장면. 인디플러그 제공
영화 <1991, 봄> 한 장면. 인디플러그 제공
최근 서울 공덕동 <한겨레>에서 만난 권경원 감독은 “91학번 대학 신입생으로 시위에 나갔더니 폭력이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캠퍼스 드라마와 달리 실상은 ‘우리들의 지옥’이었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대학 졸업 뒤 영화판에 발을 들인 권 감독은 어떻게든 1991년의 일들을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1년은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가장 아픈 시기인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누구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어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왜 못 막았는지, 이제는 되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권 감독은 당시 상황을 블랙 코미디 영화로 풀어내기로 하고 시나리오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자료 조사를 하던 중 강기훈씨를 만났다. 1991년 국가폭력에 저항하다 분신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쓰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실형을 받았던 그는 2015년 재심 끝에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강기훈씨를 만나니 조곤조곤하면서도 알 수 없는 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력을 느껴서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면 어떨까 하고 시나리오를 수정하기도 했죠.”

그러던 중 강씨가 간암에 걸렸다는 연락을 받았다. 영화를 떠나 만남을 계속 이어갔다. 당시 진행중이던 재심 전망마저 안 좋아지자 강씨를 지지하는 시민 모임에서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시민 모임으로부터 부탁받은 권 감독은 고민 끝에 다큐멘터리 제작을 수락했다.

영화 <1991, 봄> 속 강기훈씨가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 인디플러그 제공
영화 <1991, 봄> 속 강기훈씨가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 인디플러그 제공
강씨는 클래식 기타를 즐겨 연주했다. 강씨가 밥집에서 연 소박한 연주회를 카메라에 담은 적 있는 권 감독은 음악으로 영화를 풀어내기로 했다. 강씨가 직접 연주한 ‘기타를 위한 전주곡’, ‘아멜리아의 유서’, ‘성당’, ‘눈물’, ‘망각’, ‘사라방드’, ‘이별의 전주곡’, ‘카바티나’는 그대로 영화 각 장의 제목이 됐다. 모두 8장으로 구성된 영화는 강씨뿐 아니라 1991년 봄에 스러진 11명의 청춘들도 하나하나 조명한다. 완성까지 꼬박 4년이 걸린 영화에는 1300여명이 소셜 펀딩으로 제작비를 보탰다.

“기타의 울림통처럼 작지만 큰 울림을 만들어내는 영화이길 바랍니다. 관객들이 죄책감, 분노 같은 걸 떠나 우리가 놓쳤던 기억을 되살리고 피해자의 마음에 공명해줬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모르는 젊은 관객들이 많이 봐줬으면 해요.”

인터뷰를 마치기 직전 권 감독은 16살 학생이 영화제에서 먼저 영화를 보고 보내온 글을 보여주었다. 내용은 이랬다. “80년대, 90년대를 다룬 내용은 제게는 먼 얘기입니다. 사실 오늘 영화를 보면서도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인터뷰를 하시는 분들의 표정이, 눈빛이, 말들이 참 기억에 남습니다. 분명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분들이었지만, 그래서 강한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시는 분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눈빛에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어린아이가 보였습니다. 까만 화면에 하얀 활자로 길게 내려오는 이름들을 보며, 터무니없이 길게 이어진 골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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