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이크의 해’ 영화 제작사·감독들이 꼽은 선별법 5가지
올해 한국영화시장은 ‘리메이크’가 주도했다. 연초부터 <리틀 포레스트>를 시작으로 <지금 만나러 갑니다>, <골든 슬럼버> 등 일본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 줄줄이 리메이크됐고, <사라진 밤>, <독전>, <바람 바람 바람>, <인랑>이 그 뒤를 이었다. 10월31일 개봉해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완벽한 타인>과 오는 8일 개봉 예정인 공포영화 <여곡성> 역시 리메이크 작품이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을 보면, 현재까지 ‘한국영화 톱20’에 6편의 리메이크 작품이 올라있다. 리메이크가 영화시장의 판도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셈이다.
리메이크 열풍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청설>(대만), <인비저블 게스트>(스페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일본), <익스토션>(푸에르토리코), <스틸 라이프>(이탈리아) 등 다수의 영화가 이미 리메이크 확정 소식을 알렸다.
그렇다면, 제작사와 감독, 투자배급사들은 어떤 영화를 리메이크할까? 또 리메이크할 때 어떤 부분을 살리고 어떤 부분을 각색하는 것일까? 올해 개봉한, 혹은 개봉 예정인 영화를 중심으로 ‘리메이크 영화의 법칙’을 짚어본다.
‘소확행’ 명중시킨 ‘리틀 포레스트’
통일 준비과정 혼란상 치환한 ‘인랑’ ② 숨은 명작을 찾아라
원작보다 판권 비싼 ‘완벽한 타인’
10월말 개봉 직후 박스오피스 1위 ③ 한국적 감성 입혀라
스토리텔링·정서·관계 중시
‘상황 유머’로 군데군데 숨구멍을 ④ 홍보 부재도 전략
스포일러 막으려 블로거에 애걸복걸
덜 알려진 명작일수록 ‘시치미 작전’ ⑤ 다작·과욕은 금물
관객수·손익분기점 다 잡긴 어려워
독창성 한계 ‘게으른 재탕’ 지적도 ■ 원작과 다른 한국인 입맛에 맞는 코드를 심어라 좋은 작품을 선별했다고 끝이 아니다. 리메이크가 성공하려면, 원작에는 없는 ‘한국적 코드’를 어떻게 심을 것이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제작사와 감독들은 “원작과 너무 달라도 팬들에게 원성을 살 수 있고, 너무 똑같아도 한국적 감성이 부족해 다수의 관객에게 외면받을 수 있어 고민이 크다”고 말한다. <리틀 포레스트>의 경우,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로 나뉜 원작과 달리 4계절을 한꺼번에 담았다. 또 남녀 주인공이 미묘하게 썸을 타는 ‘연애감정’뿐 아니라 결혼과 출산까지 이르는 과정을 모두 뺐다. 임순례 감독은 “연애 역시 지금 한국의 청춘들에게 너무 ‘강박’처럼 느껴지는 듯 했고, 연애라는 코드가 들어오는 순간 영화의 전체적 흐름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에 애초부터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한국적 유머 코드를 군데군데 삽입하는 전략을 택했다. 무비락 김재중 대표는 “영화 막바지엔 결국 눈물 콧물을 다 뺄 정도로 슬프기 때문에 중간중간 숨구멍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 관객은 상황 유머를 특히 좋아하기 때문에 원작보다 이런 요소를 훨씬 많이 가미했다”고 말했다. <독전>은 원작의 반전보다는 락(류준열)과 형사 원호(조진웅) 사이의 ‘관계 변화’, 즉 의심과 믿음 사이의 줄타기를 묘사하는 데 훨씬 많은 공을 들였다. 확실한 결말을 내지 않고 관객이 상상하게 한 것도 원작과는 다른 점이다. “스토리텔링과 정서”를 중요시하는 한국 관객의 입맛에 맞춘 선택인 셈이다. <완벽한 타인>의 경우, 원작엔 없는 주인공 4명의 ‘어린 시절’을 삽입했다. 이재규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쌓여온 이들의 관계와 캐릭터를 함축한 장면으로 관객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장치”라며 “친구들끼리 월식을 보며 얼음낚시를 하고, 학습지를 푸느라 한 친구가 늦게 와 티격태격하는 것도 매우 한국적 설정”이라고 설명했다. ■ 홍보? 유명하면 업혀가고 무명이면 엎고가라 어떤 작품을 리메이크했느냐에 따라 ‘홍보전략’도 달라진다. 과거 미국 영화 <러블리 스틸>을 리메이크 한 <장수상회>(2015)나 홍콩 영화 <천공의 눈>을 리메이크 한 <감시자들>(2013), 아르헨티나 영화 <내 아내의 남자친구>를 리메이크 한 <내 아내의 모든 것>(2012) 등은 리메이크 사실을 사전에 알리지 않아 누리꾼들 사이에서 ‘표절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매의 눈’을 가진 마니아들을 속이는 것은 쉽지 않다. 한 홍보사 관계자는 “요즘엔 원작이 유명하면 업혀가고, 무명이면 엎고가라는 말이 정답으로 통한다”고 말했다. 유명하면 이름값을 적극 활용하고, 무명이면 굳이 대대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없단 얘기다. 1986년 개봉한 동명 원작을 리메이크한 공포영화 <여곡성>은 원작의 이름을 홍보에 적극 활용한 경우다. 유영선 감독은 “공포영화는 다른 장르에 견줘 예산이 적은 편이라 홍보비를 많이 쓸 수 없어 원작의 명성을 등에 업을 수밖에 없다. 국내뿐 아니라 할리우드에서도 공포나 호러 장르에서 리메이크나 리부트·속편 제작이 활발한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라고 설명했다. 반면, 원작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작’인 경우엔 스포일러를 막는 것이 최대 관건이다. <완벽한 타인>은 국내 미개봉작이지만, 지난해 이탈리아영화제에서 상영됐던 터라 스포일러의 위험성이 있었다. 박철수 대표는 “한 블로거가 인터넷에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까지 자세히 적어놓은 것을 발견해 홍보사에서 연락해 글을 내리도록 요청하기도 했다”며 “다행인 것은 원작 자체의 판권을 씨제이(CJ)에서 구입한 것으로 아는데, 아직 개봉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 리메이크는 게으르다?…절반의 확률을 잡아라 한 편에서는 리메이크 영화가 크게 느는 상황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한국영화가 새로운 소재나 스토리를 찾는 데 한계에 부딪히자 다소 게으른 방법을 택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유영선 감독은 “리메이크는 원작을 똑같이 베끼는 것이 아니다. 현 상황에 맞게 덧붙이거나 빼고, 새로운 감성을 입혀 새롭게 창조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영화 자체가 매우 트렌디한 매체기 때문에 게으른 리메이크는 관객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리메이크 영화의 성공확률은 50% 정도 남짓이다. 올해 개봉한 리메이크 영화의 흥행성적이 이를 보여준다. 500만 관객을 동원하며 2018 한국영화 흥행 순위 2위(올해 개봉 기준)에 오른 <독전>이나 260만명을 동원하며 10위에 오른 <지금 만나러 갑니다>, 15위에 오른 <리틀 포레스트>(150여만명) 등 흥행에 성공한 작품도 있지만, <인랑>(89만여명), <골든 슬럼버>(138만여명)와 같이 손익분기점도 맞추지 못한 작품도 많다. 정지욱 평론가는 “올해 리메이크 작품이 많았다고 해서 리메이크 자체를 문제라고 지적하긴 아직 이르다. 다만,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 한동안 ‘리부트나 리메이크 외엔 방법이 없냐’는 비아냥이 나온 것처럼 리메이크 자체가 영화판의 주도적인 흐름이 된다면 독창적인 한국형 시나리오나 스토리텔링이 저조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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