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록의 영웅 빅토르 최를 다룬 영화 <레토>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빅토르 최는 러시아 록의 영웅이다. 1962년 옛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고려인 2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 록 음악에 빠져 1981년 ‘가린과 쌍곡선’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가 이듬해 밴드 ‘키노’를 탄생시켰다. 서정적이면서도 시대정신을 담은 노랫말과 러시아 특유의 정서를 품은 선율은 서구의 록과는 차별화된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소련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그는 영화배우로도 활동하며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그의 음악 경력이 정점에 이르렀던 1990년 8월15일 라트비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승용차를 운전하다 버스와 충돌해 숨졌다.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갑작스러운 비극적 죽음에 충격을 받아 그를 열렬히 따르던 소녀 팬 5명이 자살했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벽에는 추모 글이 쓰여져 이른바 ‘최 벽’이 만들어졌다. 일각에선 개혁에 반대하던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가 그를 죽였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사망 후 30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러시아에서는 추모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러시아 록의 영웅 빅토르 최를 다룬 영화 <레토>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3일 개봉하는 <레토>는 빅토르 최를 다룬 영화다. 러시아에서 제작한 영화로, 지난해 5월 프랑스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면서 처음 공개됐다. 뛰어난 완성도로 주요 부문 수상이 점쳐졌던 기대와 달리 사운드트랙상을 받는 데 그쳤지만, 당시 프랑스 주요 일간지 <르 피가로>는 “우리의 황금종려상”이라 극찬했다. 프랑스 영화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올해의 영화 톱 10’에 선정했다.
실존 뮤지션을 다뤘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레토>는 최근 국내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킨 <보헤미안 랩소디>와는 결이 다르다. 퀸과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인생을 차곡차곡 담은 <보헤미안 랩소디>와 달리 <레토>는 빅토르 최의 음악인생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영화가 다루는 건 1981년 여름, 그 짧은 기간이다. ‘레토’라는 제목부터가 러시아어로 여름이라는 뜻이다. 당시 빅토르 최는 영웅도, 록스타도 아니었다. 그저 이제 막 음악을 시작하는 19살 풋풋한 청년이었다. 영화는 딱 그 단면을 잘라 아련하고 쓸쓸한 흑백 영상으로 펼쳐놓는다.
러시아 록의 영웅 빅토르 최를 다룬 영화 <레토>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이야기는 세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밴드 주파크를 이끄는 록스타 마이크, 그의 아내 나타샤, 그리고 음악가 지망생 빅토르 최가 그들이다. 빅토르 최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마이크는 멘토를 자처하며 그를 정식 록클럽에서 노래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한편, 빅토르 최에게 매력을 느낀 나타샤는 그에게 다가가고, 빅토르 최 또한 나타샤에게 끌린다. 마이크는 둘의 관계를 용인해주면서도 홀로 괴로워한다. 요컨대, 예술과 사랑과 시기로 얽힌 세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빅토르 최를 연기한 한국계 독일인 배우 유태오가 눈에 띈다.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여러 작품에 얼굴을 비치던 그는 2009년 한국에 와 영화 <여배우들> 등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연기 경력을 쌓았다. <레토> 오디션에서 2000:1의 경쟁률을 뚫고 빅토르 최 역을 따냈다. 칸영화제 사운드트랙상을 받은 작품답게 토킹 헤즈의 ‘사이코 킬러’, 이기 팝의 ‘패신저’, 루 리드의 ‘퍼펙트 데이’ 등 명곡들로 감각적인 뮤직비디오처럼 연출한 장면들도 빛난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